조부 애오와공이 남기신 이야기모음 글: 손자 병화(炳華) (한글로 옮김:관희-觀熙-오대손) *할아버님 휘는 정기(鼎基), 자는 중삼(衆三), 호는 애오와(愛吾窩)이시다.* 조부(圭延),부친(磻儒), 애오와(鼎基), 장자(洛九),손자(炳華),증손(世寧),현손(義冕), 그리고 5대손으로 이글 일부를 부연한 (觀熙)의 가계이다. 1831년 신묘년 시월열사흩날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송곡동 본댁에서 태어나셨는데 워낙 탁월한 기백과 넓으신 아량과 후덕한 인품에다 부모조상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셨으며 특히 원근친척을 두로 도울지언정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시다는 것은 고향 어디에서나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시대상을 간단히 부연하면 (할아버님이 태어나시던 무렵의 시대는 순조31년으로 안동김씨가 세도를 시작하던 때였고 왕조말기에 이르러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고 각지에 변고와 도적이 들끓어 민심히 점점 무너지던 때였다. 내가 아버님(휘 洛九)으로부터 늘 들어온 이야기중에는 효심이 지극하실쁜아니라 이미 놀라운 인내심과 넘쳐나는 추진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있다, 할아버님의 조부이신 송원공(松園公-圭延)께서 등에 등창이 나셔서 오로지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내어야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치료방법도 없고 의술이나 약조차 없어 온집안이 크게 걱정하시고 계시던 중 당시 겨우 여덟 살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직접 송원공 할아버님의 등에 난 환부를 입으로 빨아 보시겠다고 하시니 송원공은 기특하기는 하나 어린 것 입에 환부의 독기가 옮겨질 것을 념녀하셔서 거절하셨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애오와 할아버님은 끈질기도록 계속하여 직접 입으로 빨아 치료하시기를 극진히 청하셨으므로 아무도 이를 더는 말리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송원공 할아버님도 그러면 마음대로 해보라고 승낙하셨더니 무려 4.5일간을 쉬지 않고 입으로 등창에 뭉친 고름을 빨고 또 빨아내어 드디어 등창에 돋아난 병기가 차츰 가시고 차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로인해서 어리신 애오와 할아버지의 입속이 매우 헐어 있었으나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고 빨기를 중단시킬까봐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말조차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송원공께서는 7년을 잘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 송원공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애오와 할아버지는 송원공이 거처하시는 방과 침상에 요 이불을 늘 깨끗하게 정돈하시는데 열심하셨다. 송원공할아버님께서는 근간향리에서 가장 오래 조용히 그리고 편히 잘 지내시며 사셨다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애오와 할아버님의 어릴때부터 효성은 이미 근동에 자자했다.
애오와 할아버지는 늘 우리들에게 좋은 말씀을 하여 주셨는데, “책을 읽음에 앞서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의 내용을 속속 깊이 파고들어야만 그 소득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설프게 지나다보면 마침내 얻을 것이 없이 실패하고 만다. 고 하셨다. 나는 늘 이 말씀을 의미 깊게 생각하여 왔다. 내가 병오년 겨울에 맹자칠편을 터득하는데 큰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는 시성 두보(杜甫)의 옛시에도 있는 말이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보다는 무엇보다 열심히 파고들며 책을 읽어야 하는 그 맛이야 말로 참으로 오묘하고도 오묘한 진리라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마음에 아로새기고 있다. 정미년 아버님(洛九)돌아 가시던 해는 내 나이 열여섯 이였다. 두해 전에는 어머님이 작고하셨으니 이제 아버님은 여러 어린자매를 남겨 두시고 갑자기 운명하신데 대해 주야 조석으로 근심하여 마지않는 나를 할아버지께서는 이점을 더 크게 걱정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기왕 이렇게 된 일을 밤낮으로 생각하면 무얼하겠는냐? 이후로 어른들 받들고 동생들까지 거느리며 학업을 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양단중 학업을 먼저 생각하고 집안일은 나중에 하여도 좋지 않겠느냐?” 하셨지만 지금 생각하여도 그때 나의 그 결정이 할아버지 간곡하신 말씀에만 의존하고 자손으로서 중한 책임을 회피한 일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는 두 가지 일중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야 말로 뉘우치기 어려운 후회를 남기게 한다. 할아버지의 어머님이 되시는 대부인(안동 권씨)을 모심에 있어서 효행을 극진하셨는데 반드시 잡수시는 조석음식과 물은 물론이며 보약과 수시로 드시는 사소한 음식에 이르기 까지 반드시 직접 맛을 보시며 검사하시니 이는 아랫사람이나 동생들에게도 시키지 않으시고 친히 행하시며 계절마다 차고 따스운 것을 적당하게 보살피시니 징조할머님께서는 팔십여섯해를 향유하셨으며 늘 건강하게 지내셨으니 이를 두고 원근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문이 너무도 어렵고 힘든 시대(板蕩之際)에 애오와 할아버지가 태어나셔서 늘 선조에 대한 일을 말씀하여 오시던 중 별좌공할아버님(垙=별좌공 파조)의 묘소가 용인군 구수동에 있기는 있으되 그 위치를 알지 못하여 실전된 상태가 근 300여년이 지나 제사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아픔을 그대로 볼 수 없어 마침내 별좌공단소를 예천군 호명면 호명산(丁坐)에 설치하여 앞으로는 매년 이 단소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치암공(耻菴公-賁徵)의 6대사손이 되는 택기(宅基)공이 후사가 없는지라 경구(經九)공을 후계로 주선하시고, 또한 사복시정공(之貞)공의 생정(生庭)이 되시는 (만익=萬益)공의 봉사손 석구(錫九)공의 아랫대로 병선(炳璇)공으로 하여금 대를 이으시도록 주선하신 일등 이 모든 일을 앞장서서 맡아 하시고, 이어 눌헌공과 치암공양대소종가의 재정안정을 위해 보종계(補宗稧)를 세우셨으며, 눌헌선조의 외조부 되시는 선략장군 장중우(張仲羽)공의 묘가 오랫동안 향화가 끊어져 모시는 이가 없음을 아시고 위양계(渭陽稧)를 세우시며 해마다 새롭게 이어 가시도록 주선하셨다. 또한 사정공(沙庭公-慶長),치암공(분징-賁徵),사복사정공(지정-之貞)삼세의 위를 모실 수 있도록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이를 수종계(修宗稧)라 하였으며, 다시 사정공과 치암공양세 묘전(墓田)을 마련한 뒤 일문을 양노계(養老稧)라 이름하여 정하고 제단을 대대로 간수하도록 하였다. 한편 눌헌선조의 묘를 모시고 있는 산에 십여 개의 이름 없는 묘가 투총(偸塚)되어 있기에 이를 비용을 아끼지 않고 과감히 파내고 말았는데 이러한 일을 알게 된 안동부사 이계로씨와 경상 도백인 이근필씨가 선조를 향한 정성이 너무도 놀랍다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맘때 안동에 있던 무릉선정(武陵先亭)도 현재의 송곡동 눌헌사당이 있는 그 뒤에다 옮긴 것이다. 일찍이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책을 많이 사 두시면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책이 많이 있는 곳에 인재가 많이 배출할 것이라 들었다.”고 하셨다. 언제나 새벽 일찍 일어나 세수하시고 머리 빗으시는 일을 개을리 하지 않으시며 늘 부지런히 일하시면서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느리라” 집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늘 우리들에게 타이르시기를 매사에 분노하지 말고 충분히 생각해본 뒤에 행동하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내가 어릴 때 직접 겪었던 일로서 내가 성질이 급하여 하마터면 큰일 저즈를뻔한 일 한 가지가 생각난다. 정축년 봄이었다. 집 가까운 곳에 술이 고주망태가 된 상태의 길손이 한사람 누워 있기에 이를 눈에 거슬려서 두들겨 줘야하겠다고 하고 자세히 보니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아무리 보아도 작년(병자년에는 큰 흉년이 들었었다)같은 모진 흉년에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들지 못한 사람으로 보여 나무라기만 하고 그냥 돌려보냈는데 얼마지난뒤 소문에 들으니 그 사람이 문둥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하였다. 만일 내가 공연히 그 사람에게 매를 처서 보냈더라면 그로인해 그가 죽었다고 모함을 받게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 죄를 덮어 쓸 뻔하였으니 참으로 할아버지께서 “분한 마음이 나더라도 잠시 동안 생각해보라”고 하신 이 말씀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가까운 일가와 인척은 물론이고 인근의 가난한 댁의 자녀가 시집장가를 들때마다 반드시 도움을 주어서 어려움을 면하게 하셨다. 정축년 봄에는 마땅히 받아 들여야 할 거금의 돈이였지만 흉년에 고생하는 사람들 생각하시며 너그러이 그 빚을 전부 탕감해 주기 위하여 이런 많은 차용증서들을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불태워 버리니 사람들 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찍이 바로 아래 아우이신 현기(絃基)공과 사촌동생이신 남기(南基)공 두 분을 당대의 석학이신계당 유주목(溪堂 柳疇睦)선생문하로 유학을 보내셨다. (이부분을 부연한다.*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열여섯 되시던 해는 초년에 있어 중요한 기로였다고 하셨다. 첫번째로는 사대부집에 태어나 공부를 하여 벼슬을 하고 일신의 출세와 아울러 가문을 빛내는 일을 해야 하던지 아니면 두 번째로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지라 우선 생업을 찾아 가사경제를 일으켜 부모조상과 형제자매를 궁색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였는데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할 수 없었던 고민중 우선 두 번째 생각인 가사경제를 일으켜 자손으로서의 효도와 형제자매에게 우애를 펴는 것을 우선하여 이를 그때 이미 결심하시고 벼슬을 하기위해 공부하려던 생각을 미루신 것이다. 그로부터 어린 동생들과 할머님은 본채에 그대로 사시게 하시고 할아버지내외분은 그 앞채를 새로 지어 나오시면서 이때부터 가세를 떨치셨다고 하셨다. 시집 장가간 동생들이 대개 어렵게 사시는걸 보시고 재산을 풍족하게 나누어 주시면서 “내 어릴 때 보니 일가집안중에 관복을 입고 걸어서 초래청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한번 치루는 혼례인데 매우 멋지게 지내야 할 것을 너무 초라하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바 금 마흔 냥을 내놓을 터이니 앞으로는 안장달린 말을 타고 한번 뽐내보고 일생에 서운한 일이 조금이라도 덜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부모님을 여희고 지내는 것을 눈여겨보시면서 늘 아껴주시는데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반드시 쌀과 포목을 보내 주시는 것은 어린 나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하늘을 덮는 크고 망극한 은혜로 언제나 생각나게 한다. 할머니는 의성김씨로 선비이신 병추(秉秋)공의 따님으로 소박하신 성품에다 덕성이 높으셔서 내조를 잘 하시므로 집안을 이르켜세운 공이 너무도 크셨다고 생각한다. 경진년에 옛터에다 잠자리를 다시 고치려고 함에 옛 방식을 그대로 하는 것이 가장 소탈하고 좋으니라. 충고하시니 할아버님께서 “한나라 재상 소하로 하여금 나의 선생이 되게 하였구나!”하고 좋아 하셨다. 갑오년에 동학란을 일으켜서 크게 떨치던 사람들이 싸움에 패하여 흩어지다가 예천읍내에다 집강소를 세우고 나머지를 잡으려고 함에 할아버지께서는 가까운 마을과 협력하여 그들을 구해 주어 우리 마을을 편안히 살수 있도록 보호하여 인근동내는 물론 원근에 이르기 까지 후덕하심이 널리 알려지셨다. 여기에 대해 부연한다.*불한당 또는 활빈당이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어 마을을 습격하고 재물을 털어가는 일이 구한말에는 비일비재 하였었는데 이 마을을 지날 때만은 “야들아 여기는 비라이어르신네가 주무실 터이니 깨시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가자”하며 신발을 벗고 조심조심 지나갔다고 하는 일화가 지금도 학가산 아래 몇몇 마을에서 오래도록 전해 온다. *갑오갱장과 더불어 혼란이 극심하던 틈을 타서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일본정부가 사주한 일본깡패들에게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며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구름처럼 일어날 즈음에* 병신년에 할아버지께서는 문경, 예천, 상주일대의 의병을 규합하시고 참모장으로 추대 받았으며 이때에 종제이신 대기(大基)공 그리고 그 아드님 되시는 택구(澤九)공과 더불어 의거에 적극 참여하셨다. 다음해인 정유년에 종제인 대기공이 잡혀 들어갔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김천헌병대에서 용궁파견대로 옮기게 한 후 극력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나시게 하였다. 때로는 설정된 계의 일하는 사람이 죽게 되어 그 사망자를 염습하고 장례를 지내주는일에 비용을 아끼시지 않으셨다. 어느 해이던가 가을이였는데 갑작스레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손님이 찾아왔는데 몸을 가리고 있는 옷이 해어지고 남루하였다. 할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시며 하룻밤을 재워주시고 다음날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가 부대에 담긴 솜 몇 근을 내 놓으며 말하기를 이 솜은 여러 곳에서 구걸하여 모은 것인데 이것을 더 모아 팔아서 겨울옷을 지어 입으려고 하오니 선처하여 달라고 하여 할아버지께서는 솜부대를 채워 주었는데 이번 동짓달 보름날에는 새 옷을 입고 김(海苔)을 잔득 짊어지고 와서 말하기를 겨울옷을 마련하라고 주신 자금으로 밑천을 삼아 장사를 잘하여 오늘날 이렇게 당당히 큰 재물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고마워하였다 예천군에 향약소를 설치하였는데 할아버지를 향약장으로 모시고 명륜당에서 음식을 나누어 드시며 여씨가 처음 향약을 시작한 취지를 널리 말씀하셨다. “편안하게 지내면 교만하고 사치해지며 교만하고 사치함이 지나치면 그 사치스러움으로 망하게 된다”시며 춘추좌전에 있는 독이 오른 새를 비유하여 늘 일러 오셨다. “효는 백가지 행동에서 가장 근원이고 으뜸이 되는 일이니 까마귀라는 새는 그 어미에게 효도하는 새라하여 반포지조(反哺之鳥)라고 하는데 사람도 이러하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뇨” 하시면서 때로는 그렇지 못한 자식이 있으면 타이르셨다. 제사를 지내는 일은 제물이 풍부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성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니 신이 계시다면 반드시 이러한 것을 알고 계신다고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고 “정성이 있으면 신이 있고 정성이 없으면 신도 없다”라는 송나라의 주희선생 말씀을 인용하여 늘 말씀하셨다. 늘 옛시를 읊으시며 즐기셨는데 “한낮동안 김을 매는데 흘리는 땀방울이 흙밭속에 스며드니 그것이 밭에게 돌려주는 간식인줄 누가 알기나하는가 곡식 한알 한알들이 만들어지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그 참뜻을 사람들이 알아야하는 것이니라“ 참으로 짐작하기도 어렵고도 심오한 뜻이 숨어 있음을 훗날 비로소 알았다. 농사를 직접 짖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해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작료받을때는 처마를 낮추어 되라고 하셨다. 이 뜻을 부연하면 (*우리 집에서 받아들이는 말(斗)은 다른 집말과 비교하여 작았으며 고봉으로 받지 않고 평봉으로 받아서 소작인들이 운반하는 동안에 줄어든 분량을 짐작하여 분량을 줄여 주어서 늘 이익을 남기도록 하여 왔다-) 할아버지는 어리실 때 회나무를 심으셨는데 지금도 무성하여 앞마당에 큰 그늘을 널리 펴고 있어 늘 보시고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사랑스러워 하셨다. 정사년 칠월 스므아흐렛날 오전 10시경에 고향집에서 자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조용히 여든일곱해동안의 일생을 마치셨다. 장지는 먼저 작고하신 학가산 아래 센골에 모신 의성김씨와 합장하였다. *이외에도 5대조 애오와공의 일화는 넘칠정도로 많이 전하여지고 있으나 우선 증조부 병화공께서 전하신 부분만 여기에 풀어 옮기는 것이고 더는 다른 장에서 추가하고자 합니다. *한글로 옮기는 일에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문에 없는 시대적 배경과 추가로 들은 내용들을 부연하고 또는 다소 가감하였으니 해량하시 바랍니다. (오대 손 觀 熙) 참고:일부 의존자료는 의덕공 애오와공행장과 가내일화집에서 모았다(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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