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庭傳來言也(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

 

*나라 말년이 어지럽고 전쟁이 수시로 일어 불안하다보니 인심은 자기만 일고 자기자식만 걱정하고 부모와 일가 친척은 물론이고 가까운 씨족은 일찍이 눈밖에 있은지가 100여년이 넘는다.

이로서 이기주의만 팽배하여 가고 그나마 이제는 잠시 여유가 있는 생활로 돌아 왔으되 겨우 자신의 직계조상의 무덤이나 살펴 복록이나 얻으려할 욕심이나 펴볼 뿐이지, 자신이 속하는 종족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흔쾌히 목숨을 버리고 떠난 선인들의 생각은 겨우 형식에 불과한 상태에 그치고 있다.

자신이 살아 남아 오늘이 있기에는 모두 그분들의 희생이 앞섰기 때문인 것이야 아랑곳 하지 않음이 오늘의 도덕기준으로 변해 버린 터인데 차마 그 탓을 누구에게 말 할 수 있으리요. 자신의 앞날과 자식들의 영달에만 급급하다보니 잊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건만 그 중 방조이신 율리공부부께서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안타까히 운명을 달리하시고 후생의 향화조차 정성스럽지 못한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만 할 수 없어서 그 어른의 글과 흔적을 모두모아 한마당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수시로 시산을 모아 자료를 보충하고 한글로 옮겨보려한다)  이관희


息山集中北伯公遺事曰族父僉正憙無子欲托後嗣請延原公懇至公以不受命父母孤而後人所不忍也泲泣不從延原公不能强爲然所以事僉正公盡其節及壬辰僉正公羅鋒刃公遂躬收其肂內子殉亦親歛幷返故山葬以禮旣擇立主祀人其所嘗遺田宅僮指盡歸之云

息山集(이만부-李萬敷의 문집)가운데 북백공(李昌庭)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기를 첨정 이 희(李 熹)를 족부로 일커르며 율리공 이희가 오래도록 아들이 없음을 알고 공의 종질되는  연원공 해고 이광정(李光庭)이 간곡히 청하기를 "첨정공께서는 임진란을 당하여 유해조차 거두지 못한 일과 아울러 부인께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절개를 지키신 분이신데 예를 다하여 장사지내고 제사나마 받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又息山集中家世遺聞曰觀察公以不承父母之命不肯爲後於人然所以事僉正夫婦者盡其誠禮僉正産業大饒凡觀察公少有動作輒成卷給以藏擭務悅其心受以藏之亦不荀辭及僉正公夫婦卽世親營葬埋擇宗姓之可者使主其祀出前所受卷盡樊之以餘其人聞者無不歎服云

또 다른 기록인 식산집중 가세유문에 말하기를"양부모 모시지 못환 일로 관찰공이 달갑지 못한 부모의 명에 오로지 첨정공 부부에 대한 서의와 예를 다하지 못함에 같은 일가로서 향화를 오래도록 따르지 못함을 평생을 총하여 탄식하였다."한다

龍州趙泂(退陶同門)撰 北伯公神道碑文曰

謹按息山集中北伯公遺事有曰擇立主祀之人又集中家世遺文有曰擇宗姓之可者使主其祀云而僉正公壬辰殉節再明年甲午淑人邊氏卒越十一年乙巳修譜僉正公無嗣恕未可知也北伯公之孫芹谷公觀徵慶尙監司時巡到醴泉沙谷宗宅爲建祠廟享梅村栗里訥軒三先生

삼가 생각하니 식산집중 가세유문에 말하기를"부모의 양부모 모시지 못한 일"을 말하고.로또 다른 문집 가세유뮨록에서 같은 일가집안으로서 첨정공이 읾진란에 순절하신일고 그 제사를 받들이 못한 일과 숙인 부인 변씨께서 동짓달에 돌아 가심을 을사족보수단시에 기록한것과 첨정공이 자손을 이어내지 못함을 용서해 달라는 뜻으로 손자 가사 근곡 공으로하여금 예천 사곡에 사당을 짖고 매촌공,율리공,눌헌공 삼형제분을 묘향하도록 시키신일을 적는다" 하다.

 

屛銘契

僉正公生于京第隨校尉公落南時始于醴泉沙谷後移去金谷晩寓聞慶靑華山中栗藪又移居于京城西門外西江栗島公吏曺佐郞時與任百英弘彦花洞長興辛酉時年柳希規君憲阿峴晉州戊辰別試李熹子修栗里延安甲戌別試沈源河明甫眼谷靑松壬午時年崔濂道源松谷海州壬午時年閔善尙之牛川驪興壬午時年朴以龍羲瑞訥巖尙州丁丑時年柳凞緖敬承南麓文化丙戌文科各製金屛八帖作聯句而書公之詩曰共遇祥刑世同爲大理官金蘭成勝會樽酒得團欒要解三年旱何妨一日歡異時相憶處留列短屛看

첨정공이 서울에서 살시다가 교위공을 따라 낙남하여 예천사곡에서 잠시 머물다가 용문금곡에서 우거하시는중 임진란중에 문경청화산 중 율수(율수)에 이거하였으며 서울 서문밖 서강 율도(율도)에서 이조좌랑시 잠시 사신일도 있다 하는데 이로서 공의 호가 율리(율리)로 한 연관이 있다 할 것이며, 任百英(弘彦  花洞長興 辛酉時年) 柳希規(君憲 阿峴 晉州 戊辰別試) 李熹 (子修 栗里 延安 甲戌別試) 沈源河(明甫 眼谷 靑松 壬午時年) 崔濂 (道源 松谷 海州 壬午時年) 閔善( 尙之 牛川 驪興 壬午時年) 朴以龍(羲瑞 訥巖 尙州 丁丑時年) 柳凞緖 (敬承 南麓 文化 丙戌文科)와 더물어 금평풍 여덟 개를 만들어 함께 시를  연달아 지어 사마시급제를 자축하였는데  그 시를 아래에 적는다.

共 遇 祥 刑 世 「서로 만나 세상을 본받으니 반갑고」

同 爲 大 理 官 「다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네.」 

金 蘭 成 勝 會 친구우정  나누는 오늘의 잔치에

樽 酒 得 團 欒 「술잔을 높이 들어 더욱 다짐하세나」

要 解 三 年 旱 「공부 쌓던 힘든 세월 비로소 알겠구려.」

何 妨 一 日 歡 「오늘하루 즐긴들 뉘라서 어찌 하리」 

異 時 相 憶 處 「오늘 말고 다른 날 서로 보고 싶을 때는」

留 列 短 屛 看 「해어지며 나눈 이 평풍을 바라보세나   

 

 

武陵亭板上韻           李 熹

안동 무릉 절강강상에 정자를 세우고 많은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지었는데 그 중 율리공의 시는 아래와 같다.

 

島下淸江江上棲- 섬아래 맑은 물 그 강물위에 깃들이고

繞原紅樹自高低- 단풍이 온들에 물들어 절로 흥겨운데

纖埃不起房櫳靜- 티끌도 일지 않을 둥지마냥 조용한데

啁晰聲聲夜半雞- 한밤에 닭울음소리만이 어둠을 끊누나

이상의 글은 訥雲 李 炳 華 詩文集 "訥 雲 集"에서 발췌한 *栗里 李 熹*공에 관한 자료입니다 (李 觀熙)

 

栗里公遺事

諱熹字子修號栗里受業溪門司馬文科司憲府持平弘文館校理太常僉正

國朝榜目李熹字子修延安人辛酉司馬甲戌文科參議仁文曾孫 死於壬辰亂官止郡守

朝鮮名臣錄李熹字子修叅議仁文曾孫官郡守壬辰殉節

尙州鄕校道先生案

李熹延安人辛酉司馬甲戌別試文科慶尙都事時

陶山門賢錄

李熹字子修號栗里梅村弟生嘉靖壬辰遊先生門登別科官校理行誼篤厚志節堅確壬辰以太常僉正赴行朝間䦤至朔寧遇賊不屈竟被害

商山誌

李熹爲敎授延安人延安君仁文曾孫遊退溪門壬辰殉節于朔寧

東國氏族攷

李熹字子修號栗里官郡守壬辰赴行朝遇賊 不屈而死

郭漾潭守仁師友錄

李熹字子修號栗里延安人僉樞仁文曾孫生嘉靖壬辰早遊溪門行誼篤厚志節堅確登科官校理壬辰赴行在所道遇賊不屈而死

芹谷公觀徵在嶺伯時與李懶隱東標修狀請諡未果

公無子以再從姪北伯公昌庭自幼養育欲托後事及壬辰公殉節北伯公服喪盡禮甲午淑人邊氏卒北伯公返葬僉正公校尉公塋東麓回歸本庭云此在家世遺聞

按息山萬敷集中北伯公遺事

曰族父僉正熹無子欲托公後事請延原公恳至公以不受命父母孤而後人所不忍也泲泣不從延原公不能强爲然所以事僉正公盡其節及壬辰僉正公罹鋒刃公遂收其肂內子歿亦親歛並返故山葬以禮旣擇立主祀之人其所嘗遺田宅僮指盡歸之云

謹按息山集中北伯公遺事有曰擇立主祀之人云於乎僉正公壬辰殉節再明年甲午淑人邊氏卒越十一年乙巳修譜僉正公無嗣其擇立主祀之說恐未可知也

遺詩

武陵亭板上詩

島下淸江江上棲繞原紅樹自高低纖埃不起房櫳靜啁哳聲聲夜半雞

錦屛聯句

公嘗在吏曺正郞時與同僚任百英字弘彦號花洞長興人辛酉時年,柳希規字君憲號阿峴晉州人戊辰別試,沈源河字明甫號眼谷靑松人壬午時年,崔濂字道源號松谷海州人壬午時年,閔善字尙之號牛川驪興人壬午時年,朴以龍字羲瑞號訥巖尙州人丁丑時年,柳凞緖字敬承號南麓文化人丙戌文科 

共遇祥刑世 同爲大理官 金蘭成勝會 樽酒得團欒 要解三年旱 何妨一日歡 異時相憶處 留列短屛看

奉別陳謝使汝友裵三益令公之行赴燕

西郊春晩送行輈矯矯爭稱第一流丹悃無他思輔國素懷非但爲觀周百年宗社寃猶在七日秦庭哭未休此去應沾新雨露秋風相對刮矱眸

附詩

權草澗文海集中送李上舍戚文赴別擧詩

腮曝龍門志未成慈恩今日可顯名衝天島奮三年翼遂電驥思萬里程華岳風雲連去路漢津春浪漾行旌平生素志非溫飽願以忠淸贈此行

負芨相隨十載前于今追憶夢依然龍門鍾裡蓂三吐雲洞溪邊月再圓幾嘆澗松舍晩翠自慚駑馬看鞭先

退溪先生答書

別後歲月如馳忽奉尺札深慰積思如滉苦被世患驅迫年前狼狽君所自聞緣此咎責塞兩儀方俟謫罰之際反蒙恩召狎至荐加愛越超異惶戦失措自古欺天欺世更有如滉之今日者乎然莫非自取何所歸咎日夕憂惕以病自繞而己奈何學之不進所憂者固然而在滉尤甚何以爲公謀耶每念往年忍寒溪窩日傍陋門而病未接唔愄負至今所付安道空帖力疾浣墨歚寄無便令以付來使所以謝往年愄徵爲可恨然佔畢四佳及輿地諸書等所稱許如此則其人必有異於世故其於魏天使問心學答說中亦擧尹公之名人或疑之然滉意如此以之祀院豈不可也若無心緖草草不具

祭先生文

維隆慶五年歲次辛未十二月癸巳朔越十四日丙午門人成均進士李熹謹以淸酌庶羞之奠敢昭告于退溪先生之靈伏以太師東封吾道一初繼者伊誰鮮見醇如夫子挺生箕後一人眞積力久日新又新敬以作所終始尊尊云爲中禮去就得宜潛心一室左書右圖春回座上月照氷壺俯仰無怍怡然自適敎誨不倦遇蒙是擊隨才養育時雨之化道明日月德高泰華一國尊親賢愚同情瞻前顧後集厥大成斯文不幸彼蒼無知山頹樑壞小子疇依晩忝函丈最甚孤陋濫蒙不鄙庶幾披霧夙志己垂摧慕益湥祗薦薄物冀歆徵忱

金谷書堂古德進今能川剏立文

古者家有塾黨有庠所居無非敎誨之地所遊無非講學之道故問其業攷其德小而小學大而大學成人進德小子有造濟濟洋洋鼓舞振作不自知其手之舞足之踏也世洚俗末學校癈弛父不訓其子兄不敎其弟幼而不學長而無聞嗤嗤蠢蠢卒同歸於禽獸而莫之覺也此豈天之降才爯殊也哉家塾黨庠之法疥而敎養之無其具故也然則有志於訓迪蒙士作興人材者立書堂其急務也今我金谷地廣人稠居一郡之首而人才不興則反居一郡之下豈非一里父老之所羞也哉非獨一里之所羞抑亦一郡之所其歎也郡之東西雖有所謂書堂者而地偏一方各私其私願學之人莫不病焉盡謀所以更構一堂以爲作興之所乎鳴乎有敎無類性之善也十室忠信質之美也人莫不有是性有足質而氣稟拘之物欲蔽之故不能保其生質之美而日超於汚下之地矣其必師而敎之學而所之友而補之然後不失其固有之性以乃可以複其初也則書堂之作豈也今日之急務乎昔孟子方其幼也習築土於墓間效賣買於市肆而終遷於學宮之傍然後乃始爲揖讓之容則以亞聖之資初若不爲習俗之所移而居處之非其所遊戱之也其德至爲卑賤之事猶不屑焉倘無三遷之敎則築土之習賣買之事恐或未免爲童穉之累也況今閭閿小子以凡庸之資而足習是效也特築土賣買而己則三遷之敎雖未及於己往而方來之訓蒙豈可緩乎,子不敎長必頑愚太公有是言矣至要莫如敎子古人必有足言矣今之居是里世其業者莫不有子有孫以其以敎養召務者有惑人哉怙侈之夙自古未殄服美之習在今尤甚閒居而計歛散之耗息羣聚而論營産之利害自幼而及長自長而至老所見也貨財之殖則羣飮而博奕所習也集人之有則壤劈而鬪狠噫後之人雖有性之善質之美其孰從而學之漢書云黃金萬籯不如敎子一經賜子千金不如敎子一藝蓄積之多溫飽之樂不過長子孫驕侈之惡而孜孜役役終不知止焉至於敎養之事視爲迃遠而愬然無所用其心焉噫後之人雖有摳衣承敎之心其孰從而聽之記曰玉不琢不成哭人不學不知道玉不成哭猶爲璞中之物而玉自玉矣人不知道則喪其本然之性而人不人矣其爲害豈特玉之不琢哉此父老之爲子孫懼而敎養之不可吥也子夏曰百工居肆以成其事百工賤技也必居造作之處然後乃可以成其事則君子之爲學豈無所而能全其業乎必也,一堂於涔寂之境爲多士養靜之所而敎誨於斯觀感於斯見聞之習熟心氣之薰陶如入芝蘭之室而久不聞其香則中原禾菽將期霧雲之興螟蛉有海終見式穀之化而文以會友有相觀爲善之益資以麗澤無獨學寡聞之陋矣幼而學壯而行自家而及國則書堂敎養之㓛豈止於一里一郡而己哉向之徒以金帛貽子孫者不旋其踵而一朝失業士焉而學之不及農焉而努之不堪窘之如寒暑艱之如衣食,然然莫振者皆昔日怨府之所致然也然則父老之愛其子孫者不可不知當務之爲急乎富焉而出其多貧焉而出其少又得山人之彊人急者以幹其事則用,而成㓛博豈憚小小,力之費而不爲子孫無窮之計哉或爲一郡之中旣立二書唐二何必紛紛更立云爯則有一說焉彼釋老之徒琳宮梵宇遍滿於諸山而人莫之怪獨於吾儒一二肆習之所而便生疑貳之心則其亦不思甚矣或如爲今將改修鄕射堂以爲一郡之書院如何必別立云爯則如有說焉射堂在於邑居之中中輪蹄之輻湊吏民之連絡紛紛擾擾眩乎目亂乎耳而波蕩其心志俱沒其夙塵少豈士子遊息之地乎今之金谷龍門峙其竝鶴峯拱其東沃野瀰渂漢水橫帶眞形勝之地共建一堂爲多士藏修之所不亦可乎不亦美乎今夫釋子囊無一錢之儲而只掉三寸之舌鼓虔無之辤舞不根之說以惑民聽聽民皆傾財舍施之不瞬巍然煥然不見有財力之不足也以一門人民之衆信義相字心力協同則一堂之成有何雖哉若以立堂敎養爲高遠近滴之擧而吝財惜費不肯門事其爲守錢之虜則是釋子所笑而吾,之所大羞也至於有志之人不計地之遠通里之異同歡與合謀而齋力則是見人心之雖誣誣信從者衆也豈非同志之所시樂乎然此則可幸焉而不敢以强焉者也嗚呼子孫之賢愚在於今日子孫之貴賤亦在於今日機不可失時難再得今之建議如爲一人一時之所私而實父老爲子孫無窮之計也洞末進士李熹金復一等不揆庸鄙先此一書以禀可否伏惟 僉位恕亮

자료 모음  이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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