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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별좌공파-(太子詹事公派 別坐公後)  

우리가 이곳에 온 내력

경북 예천에는 삼한세족으로 유명한 성씨인 연안 이씨 별좌공파 종가가 있다.

호명면 송곡리 연안 이씨 별좌공(公)종가가 그것이다. 조선 중기에 지은 사고(沙皐) 이덕창(李德昌)의 종택이다. 선대가 자리하던 옛터에 집을 세우고 사고구려(沙皐舊廬)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덕창은 서애의 문인으로 임란 때 창의(倡義)했다.  

별좌공파는 연안이씨 대표종파로 일컷는 태자첨사공파의 종주지파로 대대로 문벌을 지켜온 전통있는 집안이다. 한때 영남서부일대에서 수많은 전장을 지켜오다가 이조말엽에 이르러 흉년이 겹치고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를 당하여 전재산을 구휼과 의병지원에 힘쓰느라 그 흔한 저택하나 짖는 것을 삼가하며 근검으후일 이로 인하여 자손이 욕심을 내어 송사를 일으킬까 저어하여 사람들을 모아 갖고 있는 산더미같은 차용증서와 금전거래문부를 모두 불살라 버리는 주도면밀함이 있었다.

이르기를 송곡뒷산 건지산을 이름하기를 활인봉(活人峰)이라 한것은 이 연안이씨의 후덕함을 칭송하여 부른것이라 전한다. (斂荒隨力賑恤窮交貧族賴而擧火..例擧不逞列枚所居後山稱活人峰其或受賜威恩者相呼識不忘故耶善慶之理宜享完局而-成均館長 權重海)
"저 산밑에는 활인하는 분이 산다 어려운 사람은 저 산아래로 찾아가고 부정한 사람은 부근을 다닐때 조심하여 다니라"  는 신돌석 의병장이 부근을 지날때마다 특히 당부한 말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후덕함이 소문나서 구한말 불한당조차도 이부근을 지날때에는 조심하며,
"비라이어른(李鼎基) 잠깨실라 발자욱소리를 내지 말라" 는 속언이 지금도 골골마다 전한다.
구한말 이마을 출신 이정기는 나라가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병신의거에 통수지휘하며 인근 문중을 대거 호응케하였으며 막대한  재산을 소문없이 내놓아 병화에 회생한 의뱡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려고 모든 거래문서를 불태워 직계 자손들 조차도 훗날 논공분쟁에 끼어 들지 못하도록 미리 대비하였다 한다.  대대로 유언하기를 산소에 치장을 삼가게하여  지금도 자손들은 조상의 묘소에 비석하나 마음대로 세우지 못함으로 소흘함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한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구태여 훗날 증표를 남겨 그 가치를 논해 무엇하리요"!로 일과하였다.(이상대구은보)

삼한세족 연안이씨가 이곳에 자리잡은 시기는 연산군이 한창 횡포를 일삼던 시기(1500)였다.

  別坐 (李 垙)公은 燕山君의 妻家가 거창愼氏로서 종동서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공은 스스로 호를 半聾齋라 하여 벼슬길을 스스로 삼가 하셨다. 佔畢齊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寒喧堂 金宏弼과 同榜 生員을 하셨다.

역사기록으로 볼때 연산군은 김종직 문하의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戊午 甲子士禍이후부터 용인 구수동에 은거하여 지냈다. 연산이 누차 불렀으나 스스로 반농제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못들은 척하여 지내시다가 용인에서 돌아 가셨다. 거창신씨 일가가 전부몰락하는 상황에서 공 내외분은 오로지 학문조차 폐하고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하시다가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이러한 기개는 조선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이어지며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자부하고 있다.

한편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별좌공공의 장인 신승복과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별좌공(垙)은 연산군과의 처가로 종동서간이지만 한편 친가로는 바로 아래 아우이신 연성군(坤)은 연산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서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공신이 되었는 바 이러한 와중에 벼슬에 오르는 길보다는 초야를 선택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특히 별좌공(광)의 차자인 교위(위수)공은 낙남하여 처음에는 예천금곡에 덕천당을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스시는 한편 안동 절겅 무릉에 이르러 무릉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당시 영남일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매촌(愈), 율리(熹), 눌헌(應),등 삼형제를 퇴계문하에 보내어 훌륭한 도학을 잌혀 나라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란 불가항력적인 전란에 임하여 수령들이 겁을 먹고 버리고 간 예천고을을 당시 용궁현감에 계시면서 예천성을 수성하였지만 재차 삼차 공격을 해온 적과의 예천성전투에서 전 가족도 함께 몰사하는 변고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매촌공) 한편 왕을 호종하던 차에 삭녕지방에서 적을 만나 항전하시다가 순절하신 분도 있으시며(율리공)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지역을 방어하시는 등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고을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쓰셨고 전란이후에 겨우 수습한 가솔을 거두어 지금의 예천 송곡에 처음으로 자리를 정하였다

校衛 (李葳壽)공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 (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명 송곡동 사고막골)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갖이시고 세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공의 맏 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      

梅村 (李 愈)

자는 子欽이요 호는 梅村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栗里, 訥軒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生員進士에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문인으로 나아갔다.

陶山文賢錄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延安人인으로 醴泉出生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龍宮縣監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히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궁 政在嶺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雪泲爲誓衝冒矢石)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에 움직일 수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土賊을 잡아 一郡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金晬)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자는 자수인데 첨추(僉正벼슬과 中樞府使를 지내신)仁文公의 曾孫으로 수를 72세라“ 이록한바 있고 또한 ”泰川縣監 재임시에 廉使 漢陰(文翼公 李德馨)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表裏衣襨)을 하사하였다”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安集使 伯巖 金訒(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前縣監 李愈로하여금  醴泉을 지키고 土賊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醴泉邑誌(懶隱 李東標찬)에는 ” 李愈는 義兵將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陣中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없어 그의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朝鮮 名臣錄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였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在野人材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襨)를 받았다.고 하였다. 기록은 중복되지만 아직 정사에 기록이 누락되어 부득이 여러 지료를 모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증명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며 이러한 기록은  세첩보유( 눌운 이병화 편)에서 참고한 것이니 앞으로 공의 기록은 사실에 상당한 기록으로 유의하기흘 바라는 바이다.

무릉정 현판을 걸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분 아우님,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訒 鄭元黙 李景嶔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 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 (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아우분을 합하여 수물한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저 있어 오늘 날 까지 보존되어 왔다.

공은 明宗이 정묘 6월에 붕하여 4달이 지난 10월에 장례를 지내고자하는 왕대비의 고집을 꺾는 상소를 올려 장일을 바로잡은 일은 율곡집에 있는 바 율곡(이이)도 공이 이를 분명하게 밝혀 대왕대비 윤씨의 판단을 옳게 하므로서 조정대신들 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은 공이 성리학 이론에 매우 투철하였음을 입증하는 면을 보여 준다.

공의 묘소는 예천호명산 선고비 묘하 동록에 모셨으며 배위는 문화류씨로 묘소는 함께 모셨다.

공의 후손은 1녀 진사 李淸(진주인 자 海益 녀 柳澤 진주인 문정의 여 金繼光) 를 두시고 후일 判事(德承 생부 應 묘 안동 임북 세천산 눌헌공 영 후록)공을 계자하였으나 판사공은 3녀와 서자 3인을 두셨는데 서자인 英男공이 아드님(碩) 한분을 두셨으나 族譜상으로 이어 오지 못했다.  후일 을사,갑술,계유보 수단시에 누락되었던 것을 경신보 수단시에 광주상애곡(廣州桑厓谷)에 族人 이 거주하는데 공의 후손(석)과 같은 단자를 보소에 내었기로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돌려 보냈더니 후에 교정공(홍로)의 후로 투탁하였다고 하나 교정공 후손은 무후이다. 사평공파의 휘 碩이 곧 그 사람들이다.

栗里 (李 熹)

자는 자수 호는 율리이다.중종 27년 임진(1532)생이 시고 명종 16년신유(156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7년갑술(1574)별시 문과에 올라 상주교수, 경상도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에 이르고 태상첨정을 지냈으며 퇴계문하에서 수업하엿다는 기록은 퇴계언행록에  있다.

퇴계선생 문집중에 이자수에게 보낸 편지가 두통있는데 퇴계선생은 성리학에 대해 매우 간곡하게 설명하신 흔적과 안부를 교환하신 정감어린 내용에 후세인들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준다.

공은 선조 3년 신미(1571)12월 퇴계선생 기세시에 제문을 올렸는데

“...실로 선생은 공자와 기자 이후 도학을 더욱 세롭게 다듬은 진정한 1인자로 추앙하여야한다”는 극찬을 시작으로 퇴계선생의 공적을 지극히 높힌 바 있어 후일 중원의 학문일지언정 동방에서 비로소 대성을 이룬 퇴계선생의 공적을 올바르게 표현한 자강자주적인 표현의 효시가 된 것이다.

상부향교 도선생안과 국조방목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기록하고 있으며 임진란에 임금을 모시고 북상하던 중 삭녕지방에 이르러 적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는 기록도 함께하였다.

묘소는 매촌공 묘하에 모시고 배위는 원주변씨(원주변씨 부는 응녕 조 참봉 관 증조 필대 외조 문억형 본 감천)이며 묘소는 공의 묘소와 같이하였으되 상하분이다.  의성김씨 연방세고에 보면 능천서당을 함께 세웠다 하였다.

능천서당은 공께서 예천 금곡에 계실 때에 남악공(김복일)과 같이 능천서당을 이르켜 후학을 가르켰다고 하는 기록이 남야집(박손경)에 있다, 이 남야집에 기록하였으되 “금곡 북쪽에 옛 덕진숙사가 있었는데  여기에 글은 첨정공이 짖고 글시는 남악공이 썼다“하였고 남악공 자손이 이것을 오늘에 이르기 가지 보관하여 왔다는 요지로 기록을 하였다.

동국씨족고에 “..(앞에 중복기록 생략) 배위 원주변씨가 무자하여 재종질 북백공(창정)을 어릴때부터 길러 왔고 후사를 마낄려고 하던차  임진란이 일어나고 공께서 뜻밖에 일을 당하여 돌아가시자 북백공은 3년의 상을 입고 양자의 예를 다하였으며 갑오년에 도 원주변씨께서 돌아가시니 북백공이 교위공선영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예를 올렸다고 하였다.

식산집(이만부)에 가정전례로 알려진 말을 인용하면 후사까지 부탁하시던 족부 첨정공의 일로 상심하여 직접 시신을 수습하여 모셔 오고 선고묘하로 장례를 지내고 3년상을 입었으나 장차 후사문제를 고민하였으나 다시 친가로 환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용주 조경이 천한 북백공 신도비에도 남아 있다.

생각건대 식산집에 공의 제사를 모실 사람을 종인이면 누구나 좋겠다고 하면서 북백공이 이를 정하고 스스로 파양하엿다는 기록은 다소 생각해볼 문제다. 첨정공은 순절직전까지 자식이 후사가 없어 북백공 (창정)을 양자로 미리 정하여어릴대부터 길러 왔던 것이 기록에 분명하며 공이 순절하신 임진년부터 그 다음해인 갑오년에 숙인 원주 변씨께서 돌아 가셨는데 11년이 지난 을사보수단시에 첨정공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되었으니 이는 첨정공 후사가 확실히 북백공이후로 단절되었음이 ,더 이상 논난의 여가 없는 것이며 후일 북백공의 손자이신 관찰공 (근곡 이관징)께서 친히 호명 송곡 종택에 오셔서 사당을 짖고 제향을 드린 바 있고 또한 첨정공의 필적이 동애공(浹)사손의 집에 보관되어 왔다는 사실등을 참고해 보면 첨정공은 한성에서 사시던 마을이 율리이며 피란처이던 문경청화산 율수라던지 한성 서문밖 서강의 율도등을 관련지으면 첨정공의 호와도 관계가 없다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니 첨정공의 자손은 북백공이 스스로 철양함으로서 그 후대 사손이 없게 되고 연안이씨 종인이면 아무나 대를 이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는 것은 당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도리이며 이로서 족보상에 무후로 된 것이 틀림없다.

공이 이조좌랑시에 任百英, 柳希規, 李熹, 沈源河, 崔濂, 閔善, 朴以容, 柳凞緖 등과 더불어 여덟첩 비단평풍에 각기 시를 지어 친목을 결의한 병명계(屛銘契)가 있다. 병풍에 올린 시귀를 살펴본다.     

共 遇 祥 刑 世 「서로 만나 세상을 본받으니 반갑고」

同 爲 大 理 官 「다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네.」 

金 蘭 成 勝 會 「친구우정  나누는 오늘의 잔치에」

樽 酒 得 團 欒 「술잔을 높이 들어 더욱 다짐하세나」

要 解 三 年 旱 「공부 쌓던 힘든 세월 비로소 알겠구려.」

何 妨 一 日 歡 「오늘하루 즐긴들 뉘라서 어찌 하리」 

異 時 相 憶 處 「오늘 말고 다른 날 서로 보고 싶을 때는」

留 列 短 屛 看 「해어지며 나눈 이 평풍을 바라보세나   

안동 절강 武陵亭에 간판을 올릴 당시 지으신 싯귀

島下淸江江上棲  繞原紅樹自高低   纖埃不起房櫳靜  啁哳聲聲夜半雞

최근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공은 대왕대비가 불교에 대한 편애로 인하여 국가기강이 문란해짐을 비감하여 상소한 자료가 발견되었기로 별도로 이 자료발간을 위한 작업을 추진중임을 첨언하며 공에 대한 기록이 이외에도 당대 유명한 사대부들과의 교유한 기록등과 특히 퇴계선생과의 사제간 주고 받은 편지내용등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으로 이오에도 무수히 많아서 이루다 적지 못함이 아쉽다.

 訥軒 (李 應)

자는 子期 號는 訥軒이다. 중종 32년 병신(1536)년 생이 시다. 선조 3년 경오 (1577)년에 사마시에 오르고 선조 8년을해에 수천으로 통례원인의에 오르시였다.퇴계선생문하에서 수업하셨다.

도산문헌록에 “공은 매촌 율리공의 아우이시며 벼슬을 버리고 안동 무릉도 에 복거하여 김약봉(극일) 김학봉(성일),황해월(여일),이몽제(안도),김운천(용),손삼성재(흥례),등 당대 선비들과 더불어 시읇고 글을 짖으 문장을 닦았다” 하고

양양지(양양지)에 “공은 예천 사곡에 계시던 중 늦게 안동절강(浙江) 강상 도화곡(桃花谷)에 작은 정자를 이루어 무릉(武陵)이라 편액을 달고 지내셨는데 칠언절구 일수를 남겼다”.

당시 무릉정(武陵亭)에 액자를 걸면서 지으신 싯귀

幽居自分一枝棲  松下茅簷不剪低  棊局罷來無箇事  更呼童子護雛雞

이뿐 아니라 당시 여러재사들과 주고받은 싯귀가 부지기수이다.

임진년을 당하여 매촌공은 예천에서 율리공은 삭녕에서 변을 만나 돌아가시고 공게서도 전쟁이 긑나던 그해 정유년에 예천송곡에서 세상을 버리시니 아드님 사고공(덕창)이 절강에서 예천으로 거처를 모두 옮기게 된 것이다.

“절강 백여리에 전쟁의 소용도리가 지나가니 마침내 사람의 종적이 간데 없구나“하는 글을 어느 시인이 당시의 광경을 회고하며 읊은 기록을 보았다.

   浙江百餘里一區 雲物管領無人處

을사년(1905) 봄에 공의 9세손(鼎基)公이 嗣孫(炳奎)공과 합의하여 무릉정을 사곡촌 후봉 건지산밑으로 옮기는데 편액은 당시 명필 해사(김성근)이 썼다. 편액의 글씨는 미남궁체(米南宮體)이다.

柳田園(道獻)이 重建記를 쓰니 이르기를 “士君子(사군자)는 마땅히 그 스승을 보아 그 행처를 짐작하는 것이라 하더니 退溪先生의 弟子다움에 있어 뛰어남이 첫 번째로 訥軒 李先生을 두고 한말이라 할 것이다.“ 하니 공이 浙江上 桃樹谷에 亭子를 짖고 當代名儒들과 함께 토론하고 詩書를 논하여 交遊하였으며 임진란을 당하여 伯仲二公과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충심갈력하신 바는 후세에 널리 알려저 있으매 이제 황량하던 그 자리를 떠나 9세손 愛吾窩公(鼎基)가 10世嗣孫 (炳奎)와 합의하여 고향땅에 새로이 이르켜 세운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하였으며 눌헌선생의 의표를 본받아 자손만대에 이어 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上樑文은 十一世孫 訥雲公(炳華)에 의하여 올려 젔다.

현제 별좌공파는 태자첨사공파의 주파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하여 문파를 제대로 이어오지 못하기에 오로지 600년간 지켜온 유일한 문파로서 별좌공파의 종손은 태자첨사공파중 판서공(貴山)과 연안군(仁文)의 주손이다. (이상 별좌공 후 이관희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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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명계첩(屛銘契諜)

  松谷敍詩  -訥雲 李炳華-송곡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서술한 시

      襄陽郡之南 古稱山水美   양양군지남 고칭산수미

      예천고을 남쪽은 아름답다고   

      옛부터 칭송해 마지 않았네

      茁律鶴駕峯 淸倚鰲川水   줄률학가봉 청의오천수

      쭈빗쭈빗 솟아오른 학가산 봉우리

      잔잔히 맑게 흐르는 오천냇물이여

      淑氣鐘磅泊 緩漣走百里   숙기종방박 완연주백리

      깨끗한 기운 머물듯 막힐듯 서로 엇갈려

      꿈틀굼틀 돌아흘러 꾸준히 먼길 달리고

      正脈落乾芝 特立碧空埼   정맥낙건지 특립벽공기

      올바로 줄기이어 마주보는 건지산이여

      높고 푸른 하늘에 홀로 우뚝하도다

      罐嶺爲輔弼 龍馬作案机   관령위보필 용마작안궤

      황새재는 보듬어 싸안아 주고

      용마봉은 마주한 책상이 되었네

      林壑爭窈窕 崗巒錯錦綺   임학쟁요조 강만착금기

      수풀이랑 계곡이랑 아름다움 자랑코나

      얼키고 설키면서 비단처럼 곱디곱네

      折旋相連續 杜斷復茁起   절선상연속 두단부줄기

      어찌보면 끊어질듯 다시 솟아 이어지고

      머물듯 하다가 다시 웃둑 뻗어 올라라

      東西兩村落 小稱金陵里   동서양촌락 소칭금릉리

      동편에도 한마을 서편에도 한마을

      흔히 "쇠무덤"이라 이름불러 왔네

      沙谷輿松墳 中古分爲二   사곡여송분 중고분위이

      솔무덤과 더불어 사고막골로

      두개의 마을이 나뉘어져 있더니

      晩近稱松谷 名洞居則異   만근칭송곡 명동거칙이

      이제는 두마을이 한마을 송곡으로

      한가지 이름에 한집안 함께 사네

      怡齊輿懶隱 尙有舊居址   이제여나은 상유구거지

      이제[曹好益] 난은[李東標] 훌륭한 두분

      일직이 이 마을에서 살았었다 하는데

      溪山依舊在 後人故點指   계산의구재 후인고점지

      골자기 산모양 옛과 다름없음이여

      오늘에 이곳도 위인이 나올걸세

      上舍土窩公 曾著山水記   상사토와공 증저산수기

      진사공[之權 호=土窩] 이곳 경치 칭송해

      일찌기 글 한 자락 남기신바 있었다네

      從是一山區 沿革亦有理   종시일산구 연혁역유리

      마침내 산 하나 두고 갈피 뚜렸하다고

      내력 따라 상고하면 일리 있는 말슴일세

      廉朴居仍散 不知何所以   염박거잉산 부지하소이

      염가 박가 이곳에 살더니

      언제 어디론지 흩어져 가버리고

      昔我訥軒祖 晩年搬移此    석아눌헌조 만년반이차

      옛날 우리 눌헌공 할아버지께서

      늦으막히 이곳에 옮겨 오셨네

      始自南下時 金谷住幾祀    시자남하시 금곡주기사

      처음은 용인에서 남으로 오실때

      용문 금곡에 잠시 머무셔서

      創建德進堂 藏奔有古紙    창건덕진당 장분유고지

      덕진당을 세우셨단

      그 흔적 옛 기록에 있다네

      復僑花府浙江桃谷裏    부교화부북 절강도곡리

      다시 안동땅[花府]북쪽에 위치한 절강

      도화곡 깊은 골자기에 옮겨 사시니

      嘗構一茅亭 棲遲可樂只    상구일모정 서지가락지

      그곳에 자그마한 정자한칸 지어놓고

      즐거히 세월 보내시는데

      伯仲梅栗公 長枕聯大衿    백중매율공 장침연대금

      매촌공도 여기서 많은 벗 사귀셨고

      율리공도 훌륭한 명성을 드날리셨네

      燃燈江齎夜 相酬數君子    연등강제야 상수수군자

      장차 훗날 이름 빛낼 영웅군자들

      글 짓고 시 읊어 주고 받았네

      不意龍蛇變 赴國伯仲死   불의용사변 부국백중사

      애닯도다 뜻밖에 임진란이 터졌으니

      나라 살리려 두형제분 일신 던져 떠나시고

      烟雲無管領 亭爲水所憊    연운무관령 정위수소비

      마을 타는 끄으름 세상을 덮어 버리고

      드나드는 물길조차 쉴곳을 막았다네

      湮沒棄瀛恨 鷗鷺下空沚    인몰기영한 구로하공지

      아련히 지나온 일족의 역사가 흔적없이 살아지며

      산비들기 백로들만 드리우는 빈터로 변하였네

      移建靑蛇春 興廢有數年    이건청사춘 흥폐유수년

      청사년 봄에 다시 터 옮기고

      그럭저럭 여러해 지나가고 말았네

      王考愛吾窩 彈誠久經紀    왕고애오와 탄성구경기

      조부 애오와공[鼎基]께서

      오래도록 지탱하게 정성을 다해

      翼然臨泉上 楯霞生光紫    익연임천상 순하생광자

      임천샘가 나를듯 다시 세우시니

      난간에 안개 피어올라 자주빛 광채 감돌아 드네

      花樹自成村 地僻遠城市    화수자성촌 지벽원성시

      한집안 꽃가지마냥 옹기설기 모여 살고

      저자거리 읍내와 멀리하고 있지만

      評品花石間 幽與何時己   품평화석간 유여하시기

      꽃과 산과 물을 벗해 즐길때에는

      세월이 언제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하니

      種桃避秦世 採菊雁晉史   종도피진세 채국안진사

      무릉도원에서 혹독한 진[秦]나라의 착취 벗어나

      국화가지 꺾던 태평성대 진[晉]의 옛일과 같으네

      耕鑿生涯足 子弟或出仕    경착생애족 자제혹출사

      밭을 갈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고

      아이들은 들락 날락 벼슬살이 가끔하니

      庾傾北海樽 謝携東山妓    유경북해준 사휴동산기

      후학 가르치며 배움을 거듭닦고 [孔隆]

      벼슬유혹 뿌리치고 조용히 사네 [.謝安]

      俯仰林泉畔 如鳥邱偶上    부앙임천반 여조구우상

      우러러 임천반[수풀과 샘이 솟는 좋은 집터]에

      나는새처럼 언덕위에 삽분 올라 앉아 있다네

      此外更何東 於分亦足矣    차외갱하동 어분역족의

      이에 더 무엇을 바라 다시 옛곳을 찾으리요

      이만하면 만족하고 만족스럽도다.

      甘作蘊鷄舞 素乏黔驢技    감작온계무 소핍검려기

      즐겨 농사 지으며 가축이나 기를걸

      검[黔]땅의 나귀처럼 어리석게도

      那料商顔寓 十年一夢似    나료상안우 십년일몽사

      어쩌다 잠시 상주[尙州]땅에 머물러

      십년세월을 꿈처럼 보내였다만

      未免克靑氈 只可安素履    미면극청전 지가안소이

      다행히 허술하나 지붕덮고 궁상은 덜었네

      새상을 사는데로 쫓아 허물없이 살아가니

      從遂孤邱願 人事奈生死    종수호구원 인사나생사

      그나마 고향언덕에 머리배고 누울수 있어

      인간사 살고 죽는것이 어찌 마음대로 하리요

      浮生盡世間 萬事盡如是    부생진세간 만사진여시

      이리저리 흘러 떠 다니는 인생이여

      만사를 버려 말지 않아야 하나니

      自怜樗瀝壽 順後漆七齒    자령저력수 순후칠칠치

      쓸모없이 나이 먹은것 이제야 깨치니

      어느덧 환갑 넘어 일곱을 더하였네

      稱夢大淵藪 暮春之上巳    칭몽대연수 모춘지상사

      을해년[대연수=乙亥년]에 꿈을 핑게하고

      삼월 삼진날 늦봄을 맞이하여

      三盃酒半燻 扶病援筆此   삼배주반훈 부병원필차

      석잔의 술과 반조각의 안주와 더불어

      병든 몸 간신히 붓을 잡아 이글을 짓나니

      不妨人不知 稱訥雲居士    불방인부지 칭눌운거사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집적일줄 모르거니

      듣건데 눌운거사라 일러주더라

      炳華字啓初 姓誰延城李    병화자계초 성수연성이

      이름은 병화[炳華]이고 자[字]는 계초[啓初]

      성은 무어라 하던고? 연안이씨[延安李氏]라

이글은 병炳자 화華자 저의 징조할아버지께서 여쉰 일곱되시던 을해년에 송곡에 대한 시를 지으신 것임 세계인명사전에서 옮깁니다.

*조선후기의 유학자,자는 啓初,호는 눌운[訥雲] 본관은 延安,仁文의 후손,정기[鼎基]의 손자,성품이 온후하고 한학에 조예가 깊어 유림에서 덕망이 높았다.벼슬은 감동관에 이르렀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주로 안진경체를 본받았다.도산서원을 비롯 영남지역 각 서원 원장을 역임하시고 유림장을 지냈음. 저서로는 訥雲集 8권이 있다.

1869년[음]11월24일에 나시고 1941년 [음]11월 4일 73세에 돌아가심.

***註釋[어려운 말에 해석을 붙임]****

양양[襄陽] 우리 고장 醴泉의 옛지명 그 중에는 水州, 醴泉, 甫州,襄陽, 基陽,甫川으로 바뀌었는데 襄陽은 고려성종때 불러왔던 명칭

오천수[鰲川水] 洛東江支流중 乃城川의 일부 중류명칭

화부[花府] 경상북부 도호부가 있던 안동의 옛이름

절강도곡리[浙江桃谷里] 안동 와룡면에 있으며 송곡동에 오기전 도수곡[桃樹谷]을 말하는 것임

용사변[龍蛇變] 壬辰倭亂을 말한 것임.龍은 임진년, 蛇는 계사년의 별칭

연운[烟雲] 전쟁이 지나간후의 황량한 하늘모습

무관령[無管領] 나라의 다스림을 벗어난 무법천지의 상태 즉.무정부상태와 같음살벌함을 말함

기영한[棄瀛恨] 살기 좋은 고을을 잃어 버린후의 뼈저린 아픔을 표현

청사[靑蛇] 집지킴이 구렁이를 말하기도 하나 한편 집터를 일커름

화수[花樹] 같은 성의 친족들.나무가지에 꽃핀 모습을 묘사

종도[種桃] 복숭아 나무를 심는다는 뜻이나 무릉도원즉 이상향[理想鄕]을 꾸민다는 뜻

피진세[避秦世]가혹한 진[秦]의 법을피한다는 뜻으로 악독한 정치를 피한다는 뜻

채국[採菊]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분수를 지키며 사는 평화롭게 사는 선비다운 인간생활의 모습

안진사[雁晉史]진[秦]나라 400년후,진[晉]나라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우연히 무릉도원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숫한 난리도 모르고 태평성대 누려온 사람들을 부러워한 가상적 도연명소설

북해준[北海樽] 의협의 사나이 북해인[北海人]공륭[孔隆=前漢時]이 후진을 가르치기위해 벼슬살이를 거절하고 물러나 [樽中酒不空]이라 큰소리치며 일생을 지낸 일화

동산기[東山妓] 진[晉]나라 사람 사안[謝安]이 동산고을에 은거하며 정승자리도 마다하고 배포있게 살았다는 옛일화[高臥東山與妓]

임천반[林泉畔] 옛 시인들의 시에 가장 살기좋은 집터를 일컬을때 인용되었슴 수풀이 있으며 샘 이 흐르는 언덕을 말함. 숨은 선비들의 위안처[枕帶林泉畔 隱居致林泉]

검려기[黔驢技]당나라 시인 柳宗元의 세가지 훈계중의 하나인데 검[黔]이라는 지방의 나귀가 범을 좋아해서 찾아 갔다가 범에게 잡혀 먹혔다는 이야기

상안우[商顔偶] 경북 상주[尙州]를 말함.

청전[靑氈] 푸른 색의 지붕을 입힌 집을 말하는데 극히 검소하다는 표현임

호구원[狐邱願]미물인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말로서 자신의 근 본이 되는 고향을 생각하는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가르침의 비유

저력수[樗瀝壽]쓸모없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나추어 말할때 쓰는 글

순후칠칠치[順後漆七齒]치[齒]는 나이를 말하는 것이며 순[順]은 이순[耳順]이라는 60세의 대명사로 여기에 일곱의 수를 더 칠 했다는 시적 표현

대연수[大淵藪] 육십갑자중에 해[亥]의 글자가 들었던 년도를 말함.당시는 을해[乙亥]년의 표현

상사[上巳] 삼월 삼일,또는 삼월달의 첫일진에 첫 사[巳] 일이 든날
인터넷에서 일부 한문이 지원되지않아 다른글자로 바뀌는 모양입니다.(??)로 표현된글자는 좀 어려운글자였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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