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인물소개   인물소개   인물소개

가문을 빛낸 선조님 안내 (자료수집순)

이정신(李正臣) 1660(현종 1)∼1727(영조 3)

조선의 문신. 자는 아언(我彦), 호는 송벽당(松蘗堂), 군수 봉조(鳳朝)의 아들. 어머니는 전라감사 홍주삼(洪柱三)의 딸이다. 박세당의 문인. 강릉 참봉을 지내고, 1699(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수찬·응교를 거쳐1711년(숙종 37) 동래 부사로 나갔다가 1716년 병조 참의가 되었다.             

소론으로 경종 초 도승지가 되어 노론을 탄핵했고, 병조 참판·경기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하조(李賀朝) 1664(현종 5)∼1700(숙종 26)

조선의 학자.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 부제학 단상(端相)의 아들. 어머니는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1682년(숙종 8)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단념.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닦았다. 1694년 음보(音譜)로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어 부평 현감에 올랐으나 37에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부(李萬敷) 1664(현종 5)∼1732(영조 8)

조선의 학자.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예조참판 옥(沃)의 아들. 어머니는 전주이씨 로 승지 동규(同揆)의 딸이다. 효성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빙고 별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전심했다. 서예에 뛰어났고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우신(李雨臣) 1670(현종 11)∼1744(영조 20)

조선의 문신. 자는 백열(伯說), 호는 십탄(十灘), 사복시 첨정 성조(成朝)의 아들. 어머니는 증찬성 조상정(趙相靜)의 딸이다. 이희조의 문인. 사산 감역(四山 監役)으로 초임, 정읍 현감·대구 판관·함양 군수·의성 현령·부평 부사 등을 역임하고 사직했다.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의 난 후 서울에 있기를 싫어하여 가평에 이주, 1771년에 사복시 첨정이 되고, 1733년에 원성 현감, 1735년 첨지중추부사·오위장·돈령부 도정, 1736년 판결사를 거쳐 동지돈령부사·한성부 우윤 ·도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사퇴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술원(李述源) 1679(숙종 5)∼1728(영조 4)

조선의 의사. 자는 선숙(善叔). 호는 화촌(和村), 시호는 충강(忠剛), 김해부사 중길(重吉)의 손자. 거창 출신. 문무를 겸비했으며, 거창읍의 좌수로 있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 나 정세가 위급할 때 거창 현감 신정모로부터 현내의 군사권을 위임받았다. 이 때 안의현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정량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정모에게 이를 토벌할 것을 요청, 현병(縣兵)을 출전시켰으나 병졸들이 흩어져 실패했다. 이어 정희량의 격문이 도착하자 신정모는 가족을 이끌고 도망했으나 그는 끝까지 부서를 지키던 중 적의 수색병을 만나 육박전으로 저항하다 피체, 정희량에게 끌려가 참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그 후 아들 우방(遇芳)이 우영장 휘하에 종군하여 거창에서 난군을 토벌, 체포된 정희량의 목을 베었으며, 사복시 주부에 승진되었다. 영조는 어사 이종성을 보내어 술원을 제사 지내게 하고 충신 정문을 세웠다. 대사헌에 추증, 거창의 포충사에 제향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양신(李亮臣) 1689)∼1739(영조 15)

조선의 문신. 초명는 종신(宗臣), 자는 원량(元亮), 희조(喜朝)의 아들. 어머니는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이다. 어유봉의 문인. 1715년(경종 1) 내시교관에 음보, 공조 좌랑으로서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병조좌랑을 지냈다. 이 해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소론의 영수 이광조의 12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탄핵했다가 곽산에 유배, 이어 경원에 이배 되었다가 곧 풀려 나왔다. 그 후 대사간을 거쳐 예조 참의를 지낸후 삼화부사(三和府使)가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익(李道翼) 1692(숙종 18)∼1762(영조 38)

조선의 문신. 자는 원명(原明). 호는 희구재(喜懼齋), 식(木式)의 아들. 음보로 삼가 현감(삼가 현감)이 된 주부에 이르렀다. 문명이 높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정보(李鼎輔) 1693(숙종 19)∼1766(영조 42)

조선의 문신.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보객정(三洲·報客亭), 시호는 문간(文簡),호조 참판 우신(雨臣)의 아들. 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 익릉 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퇴,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에 등용되었다가 1736년 지평으로서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올려 파직되었다.부수찬으로 다시 기용되어 부제학·대사간·대사성·승지를 역임, 1750년(영조 26)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여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우빈객을 거쳐 이조 판서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갔으며,이어 양관 대제학·지성균관사·예조 판서 등을 역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글씨와 한시에 능하고 시조의 대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sign_left_18_15.gif

이 후(李 王厚) 1694(숙종 20)∼1761(영조 37)

조선의 문신. 자는 후옥(厚玉), 호는 구옹(구翁), 시호는 충헌(忠獻), 연안부원군 시백(時白)의 5대손, 참판 명희(命熙)의 아들. 1762년(영조 2)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목사가 되었다가 175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 해 호남 균세사(均稅使)에 임명되어 세정(稅政) 작정(酌定)에 참여했다. 1755년 이조 참판으로 지경연사를 겸했다가 경상도 관찰사·대사간·승지·한성부 우윤·예조 참판·경기도 관찰사·형조 판서·병조 판서를 역임, 1758년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이어 좌의정에 올라 세자부를 겸임 이 때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대해 왕의 추궁을 받자 그 책임을 느끼고 이천보·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결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천보(李天輔) 1698(숙종 24)∼1761(영조 37)

조선의 문신.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晋庵), 시호는 문간(文簡), 군수 주신(舟臣)의 아들 생원시에 합격, 내시 교관으로 있다가,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자가 되고, 교리·헌납·장평을 역임, 1749년(영조 25) 이조 참판에 올랐다.그 후 이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1752년 우의정에 승진, 이 해 좌의정이 되고, 1754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령부사로 전임, 176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장헌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인책, 음독 자결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억(李之億) 1599(숙종 25)∼1770(영조 46)

조선의 문신. 자는 덕수(德수)·항승(恒承)·대수(大수), 호는 성헌(醒軒), 정랑 만성(萬成)의 아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그 일당이라는 무고로 왕의 친국을 받았으나 조리있게 대답하여 그 비범함을 인정받아 무사했다. 1751년 (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가 되고 장령·우승지·형조 판서·공조 판서·예조 판서·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그의 승진은 모두 왕의 특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sign_left_18_15.gif

이익보(李益輔) 1708(숙종 34)∼1767(영조 43)

조선의 문신. 자는 사겸(士謙), 참판 우신(雨臣)의 아들.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1년 검열에 등용되고 이어 봉교·정언·교리·응교·사인·필선·문학을 역임했다.

1749년(영조 25) 대사간에 특진하고,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752년 좌승지에서 고성 군수가 되고, 이듬해 예조 참판에 올랐으나 아첨을 하지 않아 경상도 관찰사의 외직에 나갔다. 1756년(영조 32) 대사헌에 이어 1759년 병조 판서, 이듬해 수어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승진, 1761년 우빈객, 1763년 좌참찬이 되고, 앞서 민정중이 함경도 백성들의 편익을 위해 제정했던 상정제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단이 생기에 되자, 왕명을 받고 홍계희와 함께 이를 개정했으며, 이듬해 판의급부를 거펴 추참찬이 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회양부사·병조 판서 등을 거쳐 이조 판서·판돈령부사를 지내고, 1767년 좌참찬을 거쳐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복원(李福源) 1719(숙종 45)∼1792(정조 16)

조선의 문신,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시호는 문정(文靖), 정귀(廷龜)의 6대손이며, 판서 철보(喆輔)의 아들. 음보로 양구 현감이 되고,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지평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헌납·교리를 거쳐1768년(영조 44) 대사간이 되고, 예조·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 1772년(영조 48) 대사헌에 올랐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부 판윤·강화 유수를 역임, 대제학을 거쳐 신설된 규장각 제학을 지냈다. 1780년 이조·형조 판서가 되어 찬집 당상으로 「국조보감」의 편찬에 참여, 이듬해 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전후 세번 좌의정을 역임, 1790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영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sign_left_18_15.gif

이민보(李敏輔) 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의 문신. 자는 백눌(伯訥), 호는 상와(常窩)·풍서(豊墅), 시호는 정효(貞孝), 이조참판 희조(喜朝)의 손자.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군수가 되고, 장악원정·동부승지·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1791년(정조 15) 공조 판서가 되어 장악원 제조를 겸했다. 그 후 형조 판서에 전임했다가 1796년 노인직으로 보국숭록대부의 위계에 올라 판돈령부사가 되었는데, 음보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황수신(黃守身) 이후 처음의 일이었다. 노론에 속했으며, 동서 분당 이후 당쟁을 노론의 처지에서 논한 「충역변(忠逆辯)」이란 저서가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성원(李性源) 1725(영조 1)∼1790(정조 14)

조선의 문신. 자는 선지(善之), 호는 호은(湖隱), 시호는 문숙(文肅), 좌의정 정귀(廷龜)의 후손, 정릉 참봉 득보(得輔)의 아들, 판서 길보(吉輔)에게 입양. 1754년(영조 30) 생원시에 합격, 의금부 도사에 음보되고, 176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 좌랑 교리를 지냈다.

1778년(정조 2)경상도 관찰사, 1780년 선혜청 제조를 거쳐 이듬해 병조 판서, 1784년 평안도 관찰사, 1786년 규장각 직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1788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고, 1789년(정조 13)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병사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의조(李宜朝)

조선의 학자. 자는 맹종(孟宗), 호는 경호(鏡湖), 이 재·송능상의 문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정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영(李祉永) 1730(영조 6)∼ ?

조선의 문신. 자는 유조(幼祚), 호는 임하(林下), 만회(萬恢)의 아들. 어머니는 정응상(鄭應尙)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진사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1790년(정조 14) 수찬으로 동지의 서장관(西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참판에 이르렀다.

1792년 유성한의 죄를 논한 상소문이 조리에 맞고 명문이 었으므로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었다. 1810년(순조 10) 호군으로서 「국조오례통편」을 찬진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원(李祖源) 1735(영조 11)∼1806(순조 6)

조선의 문신. 자는 현지(玄之), 호는 판교(板橋), 진보(鎭輔)의 아들. 1768년(영조 4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71년 정언이 되고, 1786년(정조 10) 의주 부윤, 1789년 이조 참의를 지냈다.  1798년 동지부사, 이듬해 동지사로 각각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좌참찬·한성부 판윤, 1800년(순조 즉위) 판의금 부사·우참찬, 이듬해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801년(순조 1)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항하다가 유배, 1805년 풀려 나왔다. 글씨는 당대 명필로 이름났다. 죽은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단전(李亶佃) ? ∼1790(정조 14)

조선의 문신. 서예가. 자는 운기(耘岐), 호는 필재(疋齋)·필한(疋漢)·인재(因齋), 평소에 패랭이를 쓰고 다녔으므로 이패랭이라 불리었다.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특히 시(時)에 뛰어났고, 글씨를 잘 썼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승(李祉承) 1736(영조 12)∼ ?

조선의 문신. 자는 경조(景祖), 참판 만회(萬恢)의 아들. 어머니는 정응상(鄭應尙)의 딸이다.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시강·정언 등을 역임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직보(李直輔) 1738(영조 14)∼1811(순조 11)

조선의 문신. 학자. 초명은 성보(城輔), 자는 유종(維宗), 호는 중주(中洲)·돈암(돈庵), 시호는 문경(문경), 정귀(廷龜)의 후손, 도신(度臣)의 아들. 김원행·김양행의 문인. 1784년(정조 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 감역이 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부수(副率)가 되었다.

1791년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의정부와 이조의 천거를 받아 경연관이 되었다.

그후 고성 군수·승지를 지내고, 1796년(정조 20) 김인후를 문묘(文廟)에 배향 할 것을 논의할 때 조헌과 김집도 같이 배향 할 것을 주장하다 한때 파직되었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우유선(右諭善)이 되고, 공조 참판·도승지를 거쳐 우참찬에 올라 사직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을 거쳐 좨주·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무주에서 죽었다. 경사(經史)에 밝아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sign_left_18_15.gif 

이문원(李文源) 1740(영조 16)∼1794(정조 18)

조선의 문신. 자는 사질(士質), 시호는 익헌(翼憲), 천보(天輔)의 아들.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고, 음보로 호조 좌랑에 승진했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승지·대사간을 거쳐 1780년(정조 4) 동래 부사,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대사성·공조 판서를 역임, 1787년(정조 11) 지경연사·선혜청 제조를 거쳐 이조 판서에 승진, 이듬해 한덕후를 잘못 천거한 죄로 숙천부에 유배, 1789년 풀려 나와 형조 판서로 다시 기용되고, 병조 판서·이조 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이정운(李鼎運) 1743(영조 19)∼ ?

조선의 문신. 자는 공저(公著), 호는 오사(五沙), 시호는 정민(貞敏), 징대(徵大)의 아들. 신창 출신.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지평 등을 거쳐 1781년(정조 5) 홍충도 암행어사가 되고, 1784년 사장관으로서 사은사 박명원 등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그후 승지 등을 지내다가 한 때 안치, 1796년 충청도 관찰사,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 1800년(순조 즉위) 현조 판서가 되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수(李時秀) 1745(영조 21)∼1821(순조 12)

조선의 문신. 자는 치가(稚可), 호는 급건(及健), 시호는 충정(忠正), 좌의정 복원(福源)의 아들,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고,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80년(전조 4) 영남암행어사로서 탐관오리를 적발했다.

이듬해 교리·수사과·조부시정을 지내고, 1783년 춘천부사로서 영동구군(嶺東九郡) 선유사가 되어 흉작의 영동 지방민을 구휼(救恤)했다.

1787년 이조 참의, 1790년 황해도 관찰사, 1795년 호조 판서에 이어 예조 판서를 역임, 1799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내의원 도제조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1804년(순조 4) 정순왕후가 재차 수렴청정하려고 할 때 대의를 들어 이를 반대, 한때 좌의정에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동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808년 영(嶺)중추부사가 되고, 12812년 진주(陳奏) 겸 주청사(奏請使)로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익운(李益運) 1748(영조 24)∼1817(순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계수(季受), 호는 학록(鶴鹿), 시호는 정숙(靖肅), 증 이조 판서 징대(徵大)의 아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2년(정조 6) 정언이 되어 시파(時派)로서 채제공(蔡濟恭)을 변호하다 한 때 파직당했다.

1788년 교리가 되고, 승지·이조 참의를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가 1794년 벽파의 논척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대사간 ·대사헌·공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 1801년(순조 1)경기도 관찰사로서 벽파에 의해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될 때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1807년 복관되고 이듬해 지(知)중추부사에 보직, 이어 수원 부 유수·대사헌을 지내고 대호군으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수(李晩秀) 1752(영조 28)∼1820(순조 20)

조선의 문신.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극翁)·극원(극園), 시호는 문헌(文獻). 좌의정 복원(福源)의 아들.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 음보로 부사과를 지내고,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795년(정조 19) 대사성 겸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정리자(整理字) 만드는 일을 감독하고 1800년 예조 판서에 승진, 이어 공조 판서·수원 유수·판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호조 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지방의 치안유지를 잘못했다는 죄로 이듬해 파직,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용서되어 수원 유수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문학에 뛰어났고 특히 변려문(변儷文)에 특출했다. 글씨에도 능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원(李始源) 1753(영조 29)∼1809(순조 9)

조선의 문신. 자는 경심(景沈), 시호는 문간(文簡), 대사간 양신(亮臣)의 손자 형조판서 민보(敏輔)의 아들. 1777년(정조 1) 사마시에 합격, 호조 좌랑에 음보,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규장각 직각·교리를 거쳐 이듬해 안악 군수를 지내고, 대사성에 승진, 1801년(순조 1)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규장각 직제학이 되고 1805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다음해 형조 판서·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 1808년 참찬을 지낸 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다음해 병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이 되어 영희전(永禧殿)에 제사를 지내고 들어오다 급사했다. 청렴했으며 문장에 능했고, 주자학에도 통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원(李肇源) 1758(영조 34)∼1832(순조 32)

조선의 문신. 자는 경혼(景混), 호는 옥호(玉壺), 시호는 문경(文景), 판서 민보(敏輔)의 아들. 1792년 (정조 16) 식년문과에 장원, 이듬해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으며 정언·지평·사간 등을 거쳐 1795년 대사간이 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조 참의·승지, 1814년 홍문관 제학, 이듬해 한성부 판윤· 이조 판서를 지내고 1816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좌빈객·평안도 관찰사·예문관 제학, 1820년 판돈령부사를 거쳐 이듬해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갔다. 귀국 후 각 조의 판서를 역임, 1827년 호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역임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해 10월 앞서 1814년 왕의 질환이 위급했을 때 반역을 도모했다는 탄핵을 받고 흑산도에 위리안치, 후에 사형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 1835년(헌종 1) 신원(伸寃)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곤수(李崑秀) 1762(영조 38)∼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서(星瑞), 호는 수재(壽齋). 아버지는 판서 성원(性源)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진사 호(護)의 딸이다. 종숙 복원(福源)에게 수업하였다.
21세 때인 1782년(정조 6) 성균관 유생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1784년 시강원설서가 되었고, 1787년에는 황해·평안 양도의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이해 9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가 병으로 요절하였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정조에게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여러 편의 응제문(應製文)과 시문을 남겼으며, 경서(經書)에 대한 강의(講義) 6편과 직제(職制)·예악(禮樂)·학문(學問) 등에 관한 정조의 말을 기록한 《일득성어록 日得聖語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윤행임(尹行任)과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수재유고》 8권 3책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익연(李翼延) 1762(영조 38)∼1815(순조 15)

조선의 서화가. 자는 방수(방수), 호는 행좌(杏左), 지순(之洵)의 아들. 초시에 급제했으나 회시(會試)에 낙방한 뒤부터 문과를 단념, 산수를 찾아다니며 서화를 연마했다

그림은 꽃과 과일에 능했고, 글씨는 전서(篆書)를 잘 썼다.  sign_left_18_15.gif 

이존수(李存秀) 1772(영조 48)∼1829(순조 29)

조선의 문신. 자는 성로(性老), 호는 금석(金石)·연유(蓮遊), 시호는 문익(文翼), 판서 문원(文源)의 아들. 어머니는 이조판서 심수(沈수)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1800년 겸설서·대교·수찬을 거쳐 1802년(순조 2) 검상·직각,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808년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10년 부제학·규장각 직제학·전라도 관찰사·이조 참판, 1812년 비변사 제조를 거쳐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1814년(순조 14)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김종한 등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1818년 좌부빈객·좌참찬·한성부 판윤, 이듬해 대사헌, 1820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 형조 판서·호조 판서·우참찬·병조 판서·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27년 우의정을 거쳐 1829년 좌의정이 되었고, 시문(詩文)에 능했다.   sign_left_18_15.gif 

이봉수(李鳳秀) 1778(정조 2)∼1852(철종 3)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자강(子崗), 호는 대은(大隱)·금계(襟溪), 판서 시원(始源)의 아들. 어머니는 청풍김씨로 현감 안묵(安默)의 딸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정조로부터 「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아 권학의 격려를 받았다.

종조부 직보와 임노·오희상 등에게 수학, 1805년(순조 5) 생원이 되고, 1812년 세마·감찰·의빈부 도사·의령 현감·공주 판관을 역임, 이어 의성현령을 지내고 낙향했다. 그후 돈령부 판관·장악원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수(李趾秀) 1779(정조 3)∼1842(헌종 8)

조선의 문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옥천 출신.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의 벼슬을 거쳐 서연관이 되어 세자에게 학문을 전강했고, 부승지를 지낸 후 1840년(헌종 6) 회양부사가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약우(李若愚) 1782(정조 6)∼1860(철종 1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용(景容), 호는 호거(壺居), 시호는 문간(文簡), 도정 낙수(洛秀)의 아들. 대교 곤수(崑秀)에게 입양.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 천거를 받아 강릉 참봉이 되고, 부수로서 181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홍문관에 보직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823년 통정대부에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1826년 병조 참의, 1835년(헌종 1) 대사헌에 승진되어, 이조·병조·형조·공조·호조의 참의를 역임했다. 1848년 예조 판서에 승진, 「삼조보감(三朝寶鑑)」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하고, 1841년 동지사로 명 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후 청녕군에 봉해지고 공조·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 제술관이 되고, 1852년(철종 3) 예조와 공조의 판서, 1856년 형조 판서가 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그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했고, 역학·산수에도 정통했다.  sign_left_18_15.gif 

이기수(李驥秀) 1783(정조 7)∼1816(순조 16)

조선의 문신. 자는 자야(子野), 호는 원천(原泉), 태원(太源)의 아들. 1812년(순조 1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이 문학에 이르렀고, 문장이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가우(李嘉愚) 1783(정조 7)∼1852(철종 3)

조선의 문신. 자는 윤빈(允賓), 시호는 문정(文貞), 군수 전수(田秀)의 아들. 1816년(순조 1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을 거쳐 1826년 직각(直閣)이 되고, 1839년(헌종 5)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842년 공조 판서, 1850년(철종 1)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종우(李鍾愚) 1801(순조 1)∼ ?

조선의 문신·서화가. 자는 대여(大汝), 호는 석농(石農), 시호는 문헌(文憲), 조원(肇遠)의 아들. 1851년(철종 2) 홍문관에 등용되고 1853년 부사과·예방 승지, 1856년 강원도 관찰사, 1858년에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ㄹ역임, 1859년 우참찬·이조 판서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병조 판서가 되고 1862년(철종 130 함경도 관찰사로 있다가 함흥 민란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그의 글씨는 석농체라 하여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교익(李敎翼) 1807(순조 7)∼ ?

조선의 화가. 자는 사문(士文), 호는 송석(松石), 산수와 화접을 잘 그렸다.  sign_left_18_15.gif 

이일우(李佾愚) 1821(순조 21)∼1874(고종 11)

조선의 무신. 자는 주팔(周八), 경상도 관찰사 재수(在秀)의 아들. 1843년(헌종 9) 무재(武才)를 인정한 조병귀가 추천하여 무과에 응시케 했으나 불응하자 왕의 특명으로 시험을 거치지 않고 급제케 했다. 1847년 우위장이 되고, 1850년(철종 1) 가덕진 첨절제사를 거쳐 영원(寧遠) 군수가 되어 선치했다. 1857년 죽산 부사를 지낸 뒤 면천에 은거했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연(李祖淵) 1843(헌종 9)∼1884(고종 1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집(景集), 호는 완서(翫西), 시호는 충정(忠貞), 용규(用奎)의 아들. 1880년(고종 19) 감찰로서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다시 조병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 왔다.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고선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를 따라 천진에 간 유학생·공장들의 실정을 조사했고, 이어 통리기무아문 주사(統理機務衙門 主事)로 사은 겸 진주사 조영하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대원군 수금에 대한 간사를 표하고 귀국했다. 이 해 청나라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 좌감독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기계국총판·혜상공국 총판·이조 참의·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 1884년(고종 21) 협판군국사무 겸 기계국 총판으로 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대당의 거물로 지목되어 독립당 행동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현섭(李鉉燮) 1844(헌종 10)∼1910(융희 4)

조선의 지사.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진(軫)의 후손. 경북 군위 출신. 1885년(고종 22) 성균 생원의 되었으나 다음해 평안도 철산 사건으로 유기호·이만응·이명연 등 영남 명유들이 유배될 때 형 현무와 함께 견책을 받았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경자 경북 예안 양평리에 은거했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단식을 결행하다가 음독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재(李道宰) 1848(헌종 14)∼1909(융희 3)

조선의 문신. 자는 성일(聖一), 호는 심재(心齋), 시호는 문정(文貞), 명익(溟翼)의 아들. 건익(健翼)에게 입양. 1882년(고종 19) 생원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6년 호군으로 재직 중 사대당에 의해 고금도에 유배 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정부가 수립되자 풀려 나왔다. 이 해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 지휘자 전봉준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했으며, 이듬해 지방관제 개혁 때 전주부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군부 대신을 거쳐 학부 대신이 되었으나 단발령을 반대하고 사직했다. 후에 다시 학부 대신에 임명되어 1898년(광무 2) 지석영의 청을 들어 한성의학교의 설치를 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다. 그후 내부 대신을 거쳐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이르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 설(李 설) 1850(철종 1)∼1911

조선의 의사, 자는 순명(舜命), 호는 복암(復庵), 조익(祖益)의 아들. 조겸(祖謙)에게 입양, 충청도 홍성 출신. 1889(고종 26) 생원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에 등용, 이어 수찬·교리·정언을 지내고 지평으로 동·서학 교수와 전시 대독관(殿試對讀官)을 겸했다. 1894년 응교·사복시정에 올랐고, 1895년 도부승지·우부승지에 이르렀으나 민비의 피살 사건을 한탄, 사직하고 낙향, 목사 이승우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피체, 특지로 석방되었다. 그 후에 다시 토왜(討倭)의 격문을 돌렸고 내부 대신 이용태의 주선으로 안주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의 처형을 상소하고 경무청에 붙잡혔다가 1910년 석방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병화(李炳華) 1869(고종 6)∼1942

유학자. 자는 계초(啓初), 호는 눌운(訥雲)·어산(於山), 정기(鼎基)의 손자. 음보로 감동관(監董官)을 지냈으며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안진경체를 잘 썼다. 죽은 뒤 유림장이 겨행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영(李道榮) 1884(고종 21)∼1933년

서화가.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면소(면巢)·벽허자(碧虛子), 서울 출신. 안중식·조석진의 문인. 글씨는 예서·행서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인물·화조·절지·기명 등에 뛰어났다. 1918년 조석진·안중식·김응원·오세창 등과 함께 서화협회를 조직, 조선 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이동녕(李東寧) 1869(고종 6)∼1940년

호는 석오(石吾), 충남 천안 출신으로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 해 북간도에 가서 이상설·여준(呂準) 등과 용정에서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총무가 되었고 1910년에는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의 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권업회(權業會)를 조직하여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이 되었고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하던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1922년 에는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단결을 촉진했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했고 이어 대통령 대리가 되었으며 26년 국무령이 되었다. 1928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에 피선되었고 1929년에는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 결성에 참가하여 항일전에 투신했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장사(長沙)로 이전했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니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범녕(範寧  1892-1982)

 

연안이씨- 첨사공파 -장령공파 -봉화공파 - 진사공파, 김포출생-
김포시사 2011년 3권 156쪽, 역사인물, 근현대편. 발췌.(이중택서술 일부)
1605년 연안이씨 족보를 처음 만드신 청백리 연봉공 기설의 장자로 1637년 병자호란때 강도에서 충절을 바치신 충현공 돈오(광흥창수)의 -2자 후백(봉화현감)-3남 상조(생원 진사공)의 6대손으로 자랑스런 8홍문가의 후손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주 자수성가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 하였으며,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 특명 동남아순회 사절단장으로 정부수립에 대한 홍보에 힘쓰시고, 대한민국 반공연맹을  (현,자유총연맹 전신) 창설하는등 사회봉사 활동에 크게 기여 하셨다.  

홈페이지   인물소개   인물소개   인물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