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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낸 선조(안내-자료수집순)


이번(李蕃) : 1641(인조 19)∼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의인(醫人). 자는 중거(仲擧). 식(植)의 손자이다.
그는 당시 유행하였던 두창(痘瘡)에 대해 의인으로 경험한 바를 종합하여 1672년(현종 13)에 용산요두편《龍山療痘篇》(1권)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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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엄(李景嚴) : 1579(선조 12)∼1652(효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호민(好閔)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에 현감으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데 대하여 백관(百官)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였는데, 현감으로 있던 그는 “이 일은 중대하여 소관들의 의논할 바가 아니니 의정부에서 잘 처리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1624년(인조 2)에 배천군수로 있으면서 불근(不謹)하다 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며, 1628년 가례(嘉禮)때 사옹원정(司饔院正)으로 있던 중 가자(加資)를 받았으나, 얼마 뒤 가도(#가15島)의 문안사(問安使)로서 까닭없이 지체하여 파직되었다.
1647년 연천군(延川君)으로 있으면서 수령으로 천거한 자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탄핵을 사간원으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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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현(李景賢) : 1579(선조 12)∼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명지(明之). 아버지는 부사 상민(尙閔)이며, 어머니는 판관 이학수(李鶴壽)의 딸이다.
7세 때 독서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세마(洗馬)가 되었다.
1612년에 전옥주부(典獄主簿)가 되고, 곧 전중도감(殿中都監)을 거쳐 낭청이 되었다.
1617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교가 되고, 이어서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직강으로 옮겼다.
1623년(인조 1) 흥해군수로 나갔다가, 그곳 이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듬해에 공조좌랑이 되었고, 1625년에 관서에 가서 북쪽 여진의 사신인 모도사(毛都司)를 접반(接伴)하였다. 형조정랑을 거쳐서 고양군수가 되고, 1627년에 수부랑첨정(水部郎僉正)을 거쳐 상례원통례가 되었다.
이듬해 정랑이 되었다가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그해 고원군수로 나갔다가, 풍토병에 걸려 임지에서 죽었다.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사람됨이 폭넓고 천진하였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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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곤(李坤) : 1462(세조 8)∼1524(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靜). 인문(仁文)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병조좌랑·헌납을 지냈으며,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윤은보(尹殷輔)와 함께 장(杖) 70의 처벌을 받았다.
1506년(중종 1) 9월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延城君)으로 봉하여졌다.
1511년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밀양부사로 외보(外補)되었다.
이때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밀양과 같은 큰 읍을 다스림에 부적합한 인물로  체직(遞職)을 청하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의 정국공신에 대한 삭훈 조치로 같은해 11월 삭록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다시 철원부사·여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524년 2월 가노(家奴)에 의하여 독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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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인(李求仁) : 1524(중종 19)∼1569(선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면지(勉之). 사헌부감찰을 지낸 구령(九齡)의 손자로, 생원 계준(繼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신흠(金愼欽)의 딸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가 되고 저작·박사·성균관전적·형조정랑·종부시첨정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함경도평사·전라도도사·곤양군수(昆陽郡守)·울산군수를 지냈다.
춘추관기주관·춘추관편수관으로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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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李道榮){2} : 1913∼1973

실업가·육영사업가. 호는 문헌(文軒). 충청북도 청원출생. 아버지는 예승(禮承)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1932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하였으며,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홍익대학을 인수하고 학교법인 홍익학원을 설립하였다.
1962년 홍익공예고등전문학교, 1965년 홍익국민학교, 1968년 홍익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70년 성암국민학교와 성북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1971년 수도공과대학을 인수하였다. 같은해 홍익대학을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켰으며, 1972년 학교법인 계원학원(繼遠學園)을 홍익학원에 흡수, 합병시켰다.
1950년 충일장학회(忠逸奬學會)를 설립하고, 1969년 문헌장학회로 개명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51년 헌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1946년 이후 일신산업주식회사 사장, 남한흥산주식회사 사장, 한국원양어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9년 홍익개발주식회사 사장, 1970년 일신동화통신기주식회사 사장과 일신동화전자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이사, 1957년 남한제지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3년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 대한광업협회 부회장, 19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65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53년 충청일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청주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대한체육회장상(체육진흥공로), 같은해 대통령표창(수출진흥공로), 1972년 문교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그의 경영이념은 신용제일주의이다.
저서로 《사학의 진로》가 1974년 홍익대학교 출판국에서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黃明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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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서(李惇敍) : 1599(선조 32)∼1637(인조 15)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晩沙). 부호군 기설(基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진26)의 딸이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선산으로 피난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마니산(摩尼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병에게 잡혔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면서, 함께 잡힌 유옹(柳雍)과 함께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죽기를 맹세하였다. 적에게 끌려가다가 진강리(鎭江里)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824년(순조 24)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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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교(李萬敎) : 1851(철종 2)∼?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치억(稚億). 아버지는 현령 원흥(源興)이며, 어머니는 안익중(安翊重)의 딸이다.
1872년(고종 9)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록(官錄)·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879년에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인 윤자승(尹滋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85년에 전라좌도암행어사가 되었지만, 능주목사(綾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국상이 실제와 많이 틀린다고 하여 중추(重推)를 당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다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나가 흥양(興陽)의 진결(陳結)폐단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뒤 내무부참의·대사간·이조참의를 순탄하게 천임하였지만, 신식제도에 어둡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관리들이 대량 퇴직당한 갑오경장 이후에는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수구파가 득세하였던 1898년 중추원의관이 된 뒤 서리대신사무·비서승 겸 장례를 역임하였고, 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899년 정종대왕을 추상존호(追上尊號)할 때 채제공(蔡濟恭)과 이이장(李#이23章)을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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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영(李萬榮) : 1679(숙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충청도 충주출신. 정(#정40)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유학으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이 장령에 이르렀으나 이조의 관리를 모욕한 죄로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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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유(李萬維) : 1674(현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지국(持國). 옥(沃)의 아들이다.
1705년(숙종 3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울산부사로 재임할 때 어사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다.
이때 경연의 연혁을 글로 써서 올렸으며, 《숙종보감 肅宗寶鑑》에 방례(邦禮)의 한 항목을 재록(載錄)할 것을 요청하였다.
같은해 홍문관의 교리·수찬의 후보자를 천거하였는데, 11명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어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연잉군(延#잉03君:후의 영조)의 왕세제책봉을 반대한 소론에 가담한
혐의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1732년 감형되어 출륙(出陸)이 허용되었을 뿐 그의 석방을 요청한 상소는 영조로부터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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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李勉愚) : 1812(순조 12)∼1878(고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여(成汝), 호는 유형(維馨).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증직된 봉수(鳳秀)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헌(獻)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학수(鶴秀)에게 입양되었다. 가학(家學)을 이어 경사(經史)를 편력하고,  시문에 능통하였다.
1836년(헌종 2)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과·선전관 등 임시직으로 있다가, 생가의 부모가 죽고 양부가 유배생활을 하는 등 집안의 환란이 계속되자 집에 돌아와 치가(治家)에 힘썼다.
그뒤 1850년(철종 1)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사옹원과 선공감(繕工監)의 봉사,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한성부주부·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57년 홍문관교리·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사복시정이 되었으며, 다시 응교·수찬·서학교수(西學敎授) 등을 지냈다.
또한, 묘호도감(廟號都監)의 도청(都廳)이 되었다가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호조참의가 되고, 다시 승정원우부승지가 되었다.
1858년 외직으로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내직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고, 그뒤 형조·이조·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가족을 데리고 지산(芝山)으로 내려가 은거하였으나, 1867년 다시 좌승지에 임명되고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예조참판에 승진, 그뒤 동지경연사·동지춘추관사·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다.
1870년 이후부터는 지산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삼정의 문란 등 시폐를 개선하기에 힘썼다.
또한,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동서고금의 인물을 독자적인 안목에서 평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는 《유형유고》 6권 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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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李命宰) : 1838(헌종 4)∼1895(고종 3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의(聖意), 호는 금어(琴漁). 아버지는 만수(晩秀)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양호(良浩)의 딸이다. 큰아버지 공익(公翼)에게 입양되었으며, 생부에게 수학하였다.
1853년(철종 4)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그뒤 성균관전적·동학교수(東學敎授) · 부교리 · 병조정랑 · 영돈녕 · 동부승지 · 이조참의 · 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내다가 몸이 쇠약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강호에 놀며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운 만년을 보냈다.
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독하였으며,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베풀어 위로 군주를 보필하고, 조정에는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국민에게 최대한의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주장하였다.
노년에는 금호(琴湖)가에 살면서 시와 노래로 소일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국문으로 저작된 〈금호어인가 琴湖漁人歌〉와 〈단경삼첩 短脛三疊〉 등은 고전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저서로는 《금어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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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李秉岐) : 1891(고종 28)∼1968

국문학자·시조시인. 호는 가람(嘉藍). 전라북도 익산출신. 변호사 채(採)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으며,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술복·문복·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 共濟》 1호에 발표한〈수레 뒤에서〉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의고조(擬古調)를 띠고 있었으며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 ∼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 ∼12.1.)·〈시조원류론 時調源流論〉(新生, 1929.1. ∼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 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 ∼2.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한바,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 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뒤 옥중작인 〈홍원저조 洪原低調〉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작은 6·25사변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탱자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으로 꼽히는데, 이것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그는 이밖에 많은 수필을 썼고, 특히 평생동안 극명하게 쓴 일기는 놀랄만하다.주요저서로는 《가람시조집》을 비롯하여 《국문학개론》·《국문학전사》·《가람문선》등이 있다.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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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탁(李順鐸) : 1897∼?

경제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효정(曉亭). 경기도출신.1922년에 일본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상학과과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연희전문학교 봉직 만 10년의 안식일 휴가(1년)로 세계각국을 시찰하였다.
1933년의 이른바 연전상과사건으로 3년의 옥고생활을 하였다.
1945년 미군정부 입법회의위원, 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상경대학장, 1948년 대한민국정부기획처 초대처장, 1949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동란으로 납북되었다.
논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조직에 관한 일고찰〉·〈노동운동과 소작운동〉·〈조선인의 결혼연령 추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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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익(李時益) : 1567(명종 22)∼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성흠(聖欽), 호는 죽재(竹齋). 찰방 빈(賓)의 아들로, 귀(貴)의 종질이며, 석형(石亨)의 6세손이다. 천성이 지효(至孝)하고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글배우기를 좋아하였다.
15∼16세에 경전제가(經傳諸家)에 박통할 정도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은 채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을 종유하면서 더욱 학문이 정미해졌고 동생인 시직(時稷)과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서울과 강도(江都)가 함락되고 남한산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이 들리자 통곡하며 자결하려 한 바 있으며, 장령을 지냈던 동생 시직이 이미 강화에서 순절한 소식을 듣고 “임금을 욕되게 하는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동생이 사소(死所)를 얻었구나.” 하고 애통해하면서도 충의의 마음이 결연하였다. 뒤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그의 행의(行誼)를 칭송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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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정(李時程) : ?∼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화(仲和). 형조정랑 빈($빈02)의 아들이다.
일찍이 과업에 뜻을 두어 진사에 오른 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학생 때인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논의가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향리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성균관에 추천되어 재임(齋任)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해군 때 폐모론에 동조한 유생들의 유적삭제문제(儒籍削除問題)가 일어나자, 위력에 못 이겨 추종한 자는 제거시킬 것을 주장, 이를 당시 성균관대사성 정엽(鄭曄)에게 건의하여 뜻을 이루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상도로 피란하여 그곳에 가까이 있는 정경세(鄭經世)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며, 이듬해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제수받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뒤에 남별궁감조관(南別宮監造官)이 되었을 때 제조(提調)였던 김자점(金自點)에게 수모를 당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방으로 피란갔으며, 만년 18년간을 은거하다가 용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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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침(李彦침) : 1507(중종 2)∼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부(仲孚). 승지 인충(仁忠)의 증손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 필(弼)의 손자이고, 남부참봉(南部參奉) 계장(繼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개성유수 성세정(成世貞)의 딸이다.1537년(중종 32)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헌납·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 1) 장령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순창군수로 나갔으며, 1547년(명종 2) 서천에 유배되자 우울하게 지내다 죽었다.
1570년(선조 3) 직첩(職牒)을 환수받았다. 그의 처 안한영(安漢英)의 딸은 열행(烈行)으로 정려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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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李泳) : 1650(효종 1)∼1692(숙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함(汝涵).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흔(欣)의 손자로 상윤(相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 허계지(許啓之)의 딸이다. 큰아버지 상주(相胄)에게 입양되었다.
1674년(현종 15) 음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곧이어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거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에 올랐다. 통례원인의에 제수된 지 1년도 안 되어 증조모 황부인(黃夫人)이 종숙의 임소인 배천에 머무르자, 배천에 가까운 신계현령(新溪縣令)을 자원하여 내려가 그를 모셨다.
그뒤 1687년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가 되고, 이어 창평현령이 되어 치민에 진력하여 그 지방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천품이 관인돈소(寬仁敦素)하고 겉치레를 싫어하였으며, 효성도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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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보(李英輔) : 1687(숙종 13)∼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몽여(夢與), 호는 동계(東溪). 통덕랑 화신(華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정(楨)의 딸이다.
유가의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하였다. 《사기 史記》를 깊이 연구하여 역사학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고대 인물의 선과 악, 정치의 잘잘못을 기탄없이 비판하였다.
특히 당시에 이단으로 지목되던 《장자》·《이소경》·《노자》 및 불경 등을 깊이 연구하여 유가의 경전과 비교분석한 뒤 옳은 것은 인정하고 그르다고 인정되는 것은 비판하였다.
1714년(숙종 40)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717년 정릉참봉(靖陵參奉)에 기용된 뒤 순탄하게 관계에 있다가 1743년(영조 19) 금성현령을 끝으로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육성하면서 지냈다. 마을에 충신과 효자, 열녀 등을 찾아 포상을 상신하고 정려각을 세우는 등 지방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동계유고》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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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李沃) : 1641(인조 19)∼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약(文若), 호는 박천(博泉). 관징(觀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호(崔#호39)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즉위증광시(卽位增廣試)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史官)을 거쳐 1668년(현종 9) 예조좌랑, 1670년 사간원 정언·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1675년(숙종 1)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그뒤 헌납·이조좌랑·응교·사간·우부승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 예송(禮訟)에 의하여 시정된 복제(服制)의 고묘(告廟)와 송시열(宋時烈) 등의 오례주장자(誤禮主張者)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아버지와 함께 허목(許穆)·윤휴(尹#휴17)를 중심으로 한 청남에 속하여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의 영수 허적(許積) 등의 반대로 삭직되어 북청(北靑)에 유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나 승지에 등용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92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직간(直諫)을 잘하여 여러 차례 유배당하였으며, 1698년 영남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고 문명도 높았다.
저서에는 《박천집》 33권과 《역대수성편람 歷代修省便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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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李鈺) :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 · 매사(梅史) · 매암(梅庵) · 경금자(絅錦子) · 화석자(花石子) · 청화외사(靑華外史) · 매화외사(梅花外史) · 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본관은 미상이나 그의 《예림잡패 藝林雜佩》에는 연안(延安)으로 되어 있고, 《해동시선 海東詩選》에는 전주(全州)로 되어 있는데, 《전주이씨대동보》에 있는 이옥이라는 인물과는 생몰연대가 다르므로 동명이인인 것으로 보인다.그의 가계를 정확히 밝혀줄 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그의 생애도 그 자신의 글과 친구인 김려(金#여34)의 문집 발문에 의하여 추정한 것이다.
초년의 성장기는 자세히 알 수 없고, 30세 전후하여 서울에서 성균관유생으로 있었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1792년(정조 16)에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소설문체를 써서 선비들이 답습하여 그 폐해가 극심하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 과거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과거에서도 여전히 문체를 고치지 못하여 충군(充軍)하도록 명을 받았다. 영남의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적되어 3일 동안 머물렀다.
1796년 별시 초시(初試)에 방수(榜首)를 차지하였으나 이때에도 문체가 문제되어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그뒤 1799년에 삼가현에 소환당하여 그곳에서 넉달 동안 머물렀다.
그뒤 서울에 돌아와서는 본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면서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의 합리주의로서 불교의 신비체험적 원리를 철저히 부정, 비판하였으며, 오행(五行)의 상생설(相生說)에 대해서도 이론의 부당함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문체파동을 겪고 현실에서 소외되고 나서부터는 전반기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허무주의적 의식의 흔적을 보여주며, 신비체험의 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등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의 저술은 친구인 김려가 교정하여 《담정총서 潭庭叢書》 안에 수록한 11권의 산문과 《예림잡패》에 시 창작론과 함께 남긴 이언(俚諺)65수가 전한다.
11권의 산문은 각각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문무자문초 文無子文#초53〉·〈매화외사梅花外史〉·〈화석자문초 花石子文#초53〉·〈중흥유기 重興遊記〉·〈도화유수관소고 桃花流水館小稿〉·〈경금소부 絅錦小賦〉·〈석호별고 石湖別稿〉·〈매사첨언 梅史添言〉·〈봉성문여 鳳城文餘〉·〈묵토향초본 墨吐香草本〉·〈경금부초 絅錦賦草〉 등이다.
이 가운데에는 전(傳)23편을 비롯하여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닌 글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예림잡패》에는 ‘3난(難)’으로 나누어 시를 창작하는 이론을 설명하였고, 4조(調)로 나누어 각 조에 10여편씩 이언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조선시풍의 경향과 밀착되어 민요풍의 정서를 담고 있으며,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간의 정 또는 시집살이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서는 〈동상기 東廂記〉를 그가 지었다고 하였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물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산문과 시는 조선 후기 문학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을 대변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우민(李友閔) : 생몰년 미상.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숙(孝叔), 호는 수졸재(守拙齋)의 아들이며. 국주(國柱)이고, 어머니는 민침(閔琛)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홍문관저작·박사·부수찬·수찬·응교·직제학을 지냈다.
또한, 성균관사예·사간원정언, 승정원의 우부승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경상도·황해도·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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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순(李元淳) : 1890(고종 27)∼1993

경제인·독립운동가. 아호는 해사(海史). 서울출신. 아버지는 이명선(李明善)이며 어머니는백씨(白氏)이다. 명필 김석준(金奭準)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7년 배재학당을 수료하였다.
1909년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수료하고 1974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잠업기술연수중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YMCA에서 영문타자를 습득하였다.
이때 이승만(李承晩)·이상재(李商在)·박교상(朴敎相)·백관수(白寬洙)·임병직(林炳稷)·임병삼(林炳三) 등과 교분이 있었다.
1911년 경신학교장비서 겸 영어교사로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근무하였다.
1914년 상해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1919년 대한독립단 회장, 1929년 대한인동지회 회장, 미주 하와이태평양주보 주필, 하와이 YMCA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 행서위원,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미국 워싱턴주재 구미위원을 지냈고, 1946년 미국 뉴욕에서 한미무역회사를 설립하였다.
1947년 한인이민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한인이민법안의 미국의회 통과를 위해 조력하였고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한국대표, KOC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조력하였다.
1948년 대한체육회 고문, 1949년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 그해 워싱턴주재 주미대사관
건물구입 및 한국 최초의 함정인 백두산호를 구입, 주선하였다.
1953년 40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한국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 대한상공회의소 대표로 아세아지역 국제상공회의에 전택보(全澤珤)와 참석(마닐라)하여 대한상공회의소를 국제상공회의소에 가입시켰다.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한국해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원용석(元容奭)과 혜인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동계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장(뉴욕), 1963년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최두선(崔斗善)·김활란(金活蘭)·오천석(吳天錫) 등과 한미협회(韓美協會)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김용완(金容完)·전택보 등과 한국경제협의회를 창설(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하여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미주지역경제사절단장, 일본·대만 등의 민간경제사절단으로 민간경제 외교를 증진, 조력하였다.
1979년 미국에서 개최된 한국미술5천년전을 계기로 문화재, 개인소장도서 및 독립관계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1982년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1987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고문, 1989년 백범기념사업회 고문, 한국시청각장애자복지회장, 광복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1982년 보관문화훈장 및 세계종교사회기구 메이슨으로부터 33급 작위와 마샬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간 이승만》·《세기(世紀)를 넘어서》 등이 있다.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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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길(李有吉)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자는 유지(有之). 종계변무(宗系辨誣)로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된 후백(後白)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왜병에게 해를 입자 검은 상복으로 기의(起義), 해남의 명량(鳴梁)에서 17세의 나이로 공을 세웠으며,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서 전봉장(前鋒將)으로 왜군과 싸우고, 명나라 유정(劉綎)의 원군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숙종 때에 정려되었으며 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강진에 사우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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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李在秀) : 1770(영조 46)∼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신로(新老). 정구(廷龜)의 후손으로, 영상 천보(天輔)의 손자이고, 판서 문원(文源)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심숙(沈#수A0)의 딸이다.
1809년(순조 9)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고, 홍문관응교·경상도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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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림(李庭林) : 1913∼1990

실업가. 호는 송정(松汀). 개성출생. 아버지는 윤신(允新)이며 어머니는 고순경(高舜慶)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21년 송도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한 뒤 1929년 도매상인 송래상회(松來商會)에서 개성상인으로서의 수련을 쌓고, 사개문서법(四介文書法)의 사용법을 배웠다.
1933년 고무신도매상을 시작하여 경기·황해·강원지방의 총대리점을 경영하였다.
1940년 경기도고무조합 이사로 재직하면서 주단포목도매업도 겸업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천일고무 이리공장에서 고무신 제조에 주력하였다.
1946년 김영준(金英俊)과 천일고무주식회사를 설립, 경영하였고, 이합상회(二合商會)를 개업하였다.
1949년 이합상회를 개풍상사(開豊商社)로 개칭하고 정식무역회사로 창립하여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53년 환도 후 호양산업주식회사(好洋産業株式會社)를 창립하여 제빙공장을 건설하였고, 1955년 대한탄광주식회사를 설립, 경영하였다.
1956년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우리나라 사상처음으로 국산시멘트공장인 대한양회 문경공장을 준공하였다.
1958년 3·1문화상제도를 만들었다.
1959년 서울은행을 창립하여, 대한양회공업이 서울은행 주식 74%를 인수하였다.
1961년 한일시멘 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62년 5·16 후 실업인 13명이 회동하여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고, 같은해 8월 3·1문화재 단을 설립하였다.
1965년 공영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67년 전택보(全澤珤)·박용학(朴龍學) 등과공동출자하여 대한선박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70년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4년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72년 해운업계에서의 공로로 대통령표창, 197년 해운의 날에 국무총리표창(단체) 및1980년 제4회 해운의 날에는 석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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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남(李至男) : 1529(중종 24)∼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효자.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 을사에 화를 입은 장령 언침(彦#침07)의 아들이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에게 배워 스스로 힘써 행할 줄 알았으므로 모두들 효성있는 자라고일컬었다. 아버지가 직언으로 탄핵을 받고 순창군수로 좌천되자 따라갔는데, 마침 군내에 김인후(金麟厚)가 살고 있었으므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김인후가 자를 지어주고, 자설까지 지어주었으며, 또 이때 이중호(李仲虎)에게도 배웠다. 뒤에 아버지가 서천으로 귀양가서 죽게 되자 지성으로 장사지내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지냈으므로, 나이 20도 못되어 지효(至孝)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
1577년(선조 10)나라 안에 학행이 있는 선비를 천거할 때 소격서의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해에 어머니 안씨가 이질을 앓아서 증세가 위급하자 목욕하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호소하여 감동시켰다.
즉, 어머니는 차츰 회복되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시탕(侍湯)과 간호에 지쳐서 피를 토하다가 그해 8월에 죽으니 사람들이 연안의 읍호(邑號)를 따라 ‘영응선생’이라 하였다.
기직(基稷)·기설(基卨)두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쌍벽(雙壁)·연주(聯珠)라고 일컬었다.
맏아들 기직은 아버지의 상사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23세에 죽고, 시집 안 간 누이는 애통해하다가 18세에 죽으니 향교구동(鄕校舊洞)에 사는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알려, 인조의 특명으로 효자문과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따라서 어머니 안씨와 부인 정씨, 아들 기직·기설, 딸이 모두 그와 더불어 표창을 받아 한 집에 여섯 정문이 세워졌으며, 임금이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뒤 또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돈서(惇敍) 및 돈오의 처 김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하여 모두 정려됨으로써, 여덟개의 정문이라는 뜻에서 팔홍문(八紅門)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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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李趾秀) : 1779(정조 3)∼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통덕랑 하주(厦柱)의 딸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병원(秉源)에게 수학하였다.
1809년(순조 9)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 현감으로나갔다가 1831년 동부승지, 1840년(헌종 6)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 8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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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호(李智皓) : 1919∼1986

지리학자·교육자. 호는 팔역(八域). 황해도 수안출신. 1941년 평양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한 뒤 1945년까지 일본 릿쇼대학(立正大學)지리역사과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 경성여자사범학교 교사를 거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창설과 더불어 사범대학 전임강사로 출발하여 1984년에 교수로 정년퇴임하였으며, 동시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광복 후 최초로 대학에 지리학 전공학과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창설하였고, 38년간 같은 학과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인구지리학·도시지리학·취락지리학에 대한 강의와 연구, 제자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0여편의 저서와 수십편의 논문을 남겼다.
특히, 광복 직후에 중고등학교 지리교과서를 통해서 지리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문교부 교육과정심의위원·장학위원 등을 지냈다.
국토개발·인구문제에도 관심이 컸으며, 건설부의 국토종합개발심의위원, 인구문제연구소 이사, 내무부 정책자문위원 등도 역임하였다.
학회활동으로는 대한지리학회의 창립회원이고 두 차례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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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李袗) : 1600(선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회(子晦), 호는 고산(孤山)·포산(匏山). 창정(昌庭)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7년에 정언이 되었으나, 홍문관에서 양사가 언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하여 대사헌·대사간과 함께 체차(遞差)되었다가 다시 정언을 거쳐 지평에 올랐다. 이후 부교리·수찬을 지내고,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1643년 8월 청나라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고애사(告哀使)로 심양에 다녀왔다.
1645년 3도의 조세운송 등을 독촉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각 도에 독운사(督運使)를 파견할 때에 호서어사(湖西御史)에 제수되었고, 이재(吏才)가 있다는 이조의 수망(首望)을 받아 수찬이 되었다.
1649년 사간이 되어 사간원의 다른 관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간원의 탄핵으로 체차되었으나, 다음해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의거하여 충원현감에서 부수찬으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그의 충원현감으로서의 치적과 출대(出代)의 시기가 농번기라는 점 및 한황(旱蝗)이 겹쳤다는 이유를 들어 충원현감에 유임시킬 것을 간청하여 허락되었다.
1654년(효종 5)교리로 김홍욱(金弘郁)의 특사를 청하는 상소에서, 왕자로서의 치정(治政) 및 당시의 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이조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인척으로서 전형(詮衡)을 좌우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후 집의·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보덕 등을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회부향미(會簿餉米)를 나누어주었다.
1660년(현종 1)동부승지·병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다음해 예조참의로 청나라 세조(世祖)의 죽음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일원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663년 대사간으로 균역을 위한 양전(量田)의 개선책을 상계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즉, 양전은 지품(地品)을 등급으로 나눔으로써 민역(民役)을 균등하게 하되, 땅의 비옥도를 살펴 등급을 정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아울러 양전에 있어서 엄격한 등급의 구분보다는 결부(結負)의 증가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병조참의·호조참의 등을 두루 거쳐 1667년 도목정사에 의하여 강원감사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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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기(李天基) : 1607(선조 40)∼1671(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재원(載元), 호는 허주(虛舟). 도사 시정(時程)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한림·삼사이랑(三司吏郎)을 역임하였고, 벼슬은 감사에서 그쳤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서 일찍 학문을 닦았고 예의범절에 밝았다.
정언으로 재직중 1641년 광해군의 초상 때 대사간 이덕수(李德洙)와 함께 예조에 올린 계사(啓辭)에 백관이 변복하고 모여서 곡한다는 등의 말로 물의를 빚자 그는 “광해가 버림받은 것은 인륜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 연산의 황란(荒亂)과는 다르므로 쫓아내고 폐하였을 때는 비록 죄인이나 관을 덮은 뒤에는 은혜를 가하여 왕자의 열(列)에 서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고 “인조께서 은혜와 예의를 특별히 더하여 비록 대우를 지나치게 하였다하여도 이것은 성상의 큰 덕에서 나온 일이므로 신하가 감히 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뒤집고 망령되고 혼미하게 하여 시비에 현혹되었음을 스스로 반성하여 삭탈관직을 자청하였고, 또 대사간 이명한(李明漢)의 상소도 있고 하여 관직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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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보(李喆輔) : 1691(숙종 17)∼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庵).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 정신(正臣)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이진(以震)의 딸이다.
1723년(경종 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고 이어서 대교를 거쳐, 1729년(영조 5)봉교로 승진하였다.
1731년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고, 1733년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과 교리를 지냈다.
1734년 각 도에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자 관서어사로 발탁되어 민정을 조사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특히, 관서지방에서 발생한 화월죄인(化越罪人) 김세정(金世丁) 등을 조사하여 처리하였다.
이어서 수찬에 승진되고, 1736년 왕명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에 암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서 부응교와 응교를 지내고 사헌부로 옮겨 지평과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으로 옮기고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승정원의 승지로 발탁되었고 1741년 안변부사로 나가서 북방지대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판비(辦備)하여 국방에 주력하였다.
1744년 대사간에 오르고, 1747년 다시 이천부사로 나갔다가 되돌아와서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시 다녀오고 1749년 동의금부사·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51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국조오례의》를 편수할 때 편집당상이 되었다.
1753년 동지춘추관사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상소하여 삭과(削科)하여 줄 것을 자청하였다.
이듬해 나주에서 일어난 괘서의 변에 주모자인 윤지(尹志)와 그 추종자들의 공사(供辭)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자, 토역소(討逆疏)를 올려서 자기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죄인을 엄중처단할 것을 강조하였다.
1755년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연접도감당상(延接都監堂上)·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757년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오니 영조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수어사(守禦使)에 제수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궤02杖)을 하사받았다.
형 길보(吉輔)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복원(福源)과 손자 시수(時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어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지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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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풍익(李豊瀷) : 1804(순조 4)∼1887(고종 24)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자곡(子穀), 호는 육완당(六玩堂). 아버지는 존우(存愚)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경안(景顔)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우의정 화우(和愚)에게 입양되었다.
1829년(순조 29)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가 되었고, 1838년(헌종 4)병조정랑, 1847년 대사간, 1873년(고종 10)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경상좌도의 시관으로 있을 때 감식에 밝고 공평하였으므로 영남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858년(철종 9)어사 이건필(李建弼)의 탄핵을 받아 김제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났다.
1881년(고종 18)예조판서로 있을 때 동궁의 풍악설치문제로 이론이 있었으나 《서전 書傳》의 고사를 인용하여 악관의 설치를 청하여 채택되게 하였다.
그뒤로 동궁이 거동할 때나 사부(師傅)의 상견례를 행할 때는 풍악을 설치하는 것이 정식화되었다.
저서로는 《육완당집》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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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징(李夏徵) : ?∼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역신(逆臣). 광주부윤(廣州府尹) 회(檜)의 아들이며, 신임사화 때의 역신 명언(明彦)·명의(明誼)의 조카이다.
1726년(영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에 음보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서임되었으며, 벼슬은 풍덕부사에 올랐다.
1747년 나주목사로 있을 때 수관문제(輸款問題)로 동래에 유배되었고, 괘서사건을 일으킨 윤지(尹志)와는 사우관계(死友關係)를 맺었다.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을 때, 임국훈(林國薰)·이효식(李孝植) 등과 함께 연루되었는데, 임국훈이 관에 바친 상자 속에는 윤지와 서신교환을 한 사람 가운데 이하징의 서찰이 가장 많았으며, 그 내용 또한 친밀하여 골육과 같았다.
왕이 친국을 할 때 취상(就商:윤지의 아버지)의 역적행위를 부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얻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복주(伏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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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상(李行祥) : ?∼1800(순조 즉위년)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 세조 때의 명신 석형(石亨)의 후예로 익위(翊衛) 신로(莘老)의 손자이다.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스승의 역책(易#책06:학덕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홀로 향촉(香燭)을 밝히고 마치 친아들같이 슬퍼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여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의 문(門)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고 하였다.
성격은 기량돈후(器量敦厚)하고 성도강확(性度剛確)하여 한번 책을 잡으면 밤새껏 책을 읽었고, 특히 《소학》·《논어》에 열중하여 늙을 때까지 학문을 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유자(儒者)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마침내 은신하여 오로지 내수(內修)에 정진하여, 시골의 수재들을 모아 사(社)를 세우고 이를 이끌어 나갔으니, 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왕림선생(旺林先生)이라 칭하였다.
정조 때 저사(儲嗣:왕세자)를 세우고 경술(經術)의 선비를 구하매 많은 사람들의 추천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4년(정조 18) 수질(壽秩)로 첨추(僉樞)에 오르고, 1824년(순조 24)에는 특별히 승정원승지로 추증되었다. 송단(宋湍)·성덕명(成德明)과 함께 이재 문하의 3처사(三處士)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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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협(李浹) :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애(東厓). 이조판서 관징(觀徵)의 아들이다.
허목(許穆)·홍우원(洪宇遠)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문예를 성취하였으며, 1689년(숙종 15)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특히 생원시에서는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같은해 유생으로 대사헌 이현일(李玄逸)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벼슬은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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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보(李熙輔) : 1721(경종 1)∼1804(순조 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재숙(載叔), 호는 녹소(麓巢).아버지는 형신(衡臣)이며, 어머니는 부안김씨(扶安金氏)로 곤(坤)의 딸이다.
일찍이 문장을 성취하여 문명이 높았는데, 특히 시에 능하여 여러 사람이 애송하였다.
1750년(영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6년(정조 즉위년)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778년 중부봉사(中部奉事), 1779년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에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작은 일로써 해직되어 귀향하였다.
그뒤《중용》·《주역》의 연구에 힘썼으며, 1790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1794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800년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차하였다.
저서로 《녹소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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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李惇) : 1609(광해군 1)∼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형보(亨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시담(時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군수 이덕순(李德淳)의 딸이다.
학문이 높았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홍주와 여주 등을 천거(遷居)하면서 어렵게 살면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자손들에게 항상 성현을 경모하고 근검절약을 잊지 말라 경계하였다.
조용히 학문을 닦았을 뿐 세상에 나타나기를 꺼렸으나 그의 문명을 전하여들은 김익희(金益熙) 등이 조정에 천거하여 6품(六品)에 서용되었다.
1652년(효종 3) 금정찰방(金井察訪)이 되고, 1657년 경양찰방(景陽察訪)을 거쳐 1668년(현종 9) 예빈별제(禮賓別提)가 되었다.
1671년 횡성현감, 1674년 통진현감을 거쳐, 1675년(숙종 1) 청도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지에 부임한 뒤 그곳의 적폐(積弊)를 바로잡은 다음, 몇 달을 넘기지 않아 사임하고 떠나버렸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오직 백성을 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을 뿐, 자신은 매우 가난하게 지내어 세인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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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민(李友閔)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숙(孝叔), 호는 수졸재(守拙齋)의 아들이며. 국주(國柱)이고, 어머니는 민침(閔琛)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홍문관저작·박사·부수찬·수찬·응교·직제학을 지냈다.
또한, 성균관사예·사간원정언, 승정원의 우부승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경상도·황해도·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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