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延安李氏)

 

  연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고을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염성(鼓鹽城)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新羅時代)에 해고군(海皐郡), 고려(高麗)에서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충선왕(忠宣王 : 제 26대 왕, 재위기간 : 1309∼1314) 때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1895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무(李 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 당나라 제 3대 왕, 재위기간 : 650∼683)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百濟)를 펑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원주(元柱), 통례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핵(核),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분양(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방(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득량(得良),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백연(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계연(季衍)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의 현손(玄孫)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던 정공(靖恭)의 아들 원발(元發)이 고려 말(高麗末)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상신(相臣)으로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으 충절을 지켰으며, 그의 아들 귀령(貴齡)과 귀산(貴山)이 세종(世宗) 때 좌의정(左議政)과 관찰사(觀察使)를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춘천 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를 지낸 속(續 : 관찰사 귀산의 아들)은 조선 초에 맹인(盲人)들의 궁중나들이를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맹인의 원한을 샀다. 그후 태종(太宗)이 속(續)의 네째 아들 근수(根粹)를 부마(駙馬)로 삼기위해 맹인 지화(池和)를 중매인으로 보냈는데, 그 원한으로써 무고로 모함을 하여 근수는 죄를 입고 창원(昌原)으로 귀양을 갔었다.
이것이 유명한 고해고경사건으로 연안이씨의 고결한 인품과 역대를 통하여 이어온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해고경-藁鞋藁經-짚으로 만든 짚신만 신겠노라.

실로 가긍할 수난과 풍전등화의 참담한 위기를 만나 어느때는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면서 숨 죽여 살아 온 고달픈 역정도 없지 않았으며, (藁鞋藁經) ●결코 위세와 권력에 아첨하여 영화를 누리지 않았다(厭戚拒婚)

함경도 경원땅에서 야인들을 규합한 무력으로 입신한 이성계가 "왕씨고려"를 빼앗아 새로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이나라를 강제통치하는 과정에서 쉽게 따르지 않는 민심을 억지장악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다하여 왕군통치(王軍統治)로 밀고 나갔였는데,이러한 광경은 해방후에도 반복하여 이방원의 후손 이승만과 이기붕이 다시 권력의 맛을 못잊어 거리의 폭도들을 앞세워 민주헌법을 농락하고 대통령자리를 세습하려한 장면과 흡사했던것이다.

공명심과 눈앞의 이익에 들뜬 불량자들을 규합이용 젊은 왕자 이방원은 정몽주등 당대 유력한 지도인사들을 대낮에 암살하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강성벌족을 상대하여 가차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유력자를 죽이거나 왕실의 위엄마저 유린하고 모함하여 적통임금마저 신돈의 씨라면서 폐하고 저항 할 수 없도록 무능한공양왕을 앞세우고 따르지 않는 지도층에 터무늬 없는 모함을 쒸워 벼슬과 재산을 배앗는 일이 예사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신라 고려를 이어 천여년 굳게 자리 잡아온 우리 연안이씨 역시 그 수난을 면하기 어려웠으니 "고혜고경(藁鞋藁經)"사건은 이같은 터무늬 없는 탄압을 말해 주는 실증적인 사례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경쟁자인 그 형제왕자들까지 도륙하고 왕이 되어 후에 태종이라 불리운 임금이 되었는데 평소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연안이씨 춘천부사 이 속(李 續)에게 늑혼(옹주사위삼기로 강혼) 할 것을 요구하자  "짚신은 짚으로 삼아 신어야 하지 않겠는가?"(藁鞋藁經)라는 비유적으로 농담한 것을 트집잡아 모든 문적을 몰수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자손3대를 금고처분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등, 당대 귀족을 역적으로 몰아 서민으로 강등시킨 가혹한 처단을 내렸으며 조상에게까지 모욕적인 공박을 주었다. 실록과 고령현부인 비석에 나타난 기록을 참고하면 춘천부사공(李 續)을 극렬하게 탄핵하는 과정에서 특히 심복들을 대거 동원하였는바 그 가운데 조말생과 하연(河演)이 더 악랄하였다. 하연은 곧 부사공의 매제 河泂의 동생으로 사건이후에는 그 형의 처까지 파혼하여 돌려 보낸다. 이런 참담한 와중에서도 이웃에 살던 정의를 잊지못한 원천석(운곡) 성석린(독곡)등 당대 지사와 문신들은 과감히 그때의 상황을 시와 일기로 그리며 남겨 지극한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자기가 타살한 정몽주의 무덤이 연고지인 영천으로 가지 않고 도중인 용인 연안이씨 묘역입구로 안정하였다는 점도 범상치 않는 일일 뿐 아니라. 선친간에 노관지교를 들어 권력을 잡은 왕에 대하여 고분고분하지 않은 연안이씨 가문의 초연히 아첨하지 않는 태도에 그냥 보고 넘기기 싫었던 모양이다. 야설에 의하면 포은 정몽주(당시 55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당시 25세)이 졸개를 시켜 무자비하게 타살한 광경을 목격한 재상 한분(연안이씨라고 전함)이 자신이 타고 가던 교자에 포은의 시신을 거두어 갔다하고 그 상여가 포은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방향을 잡고 가던 중 지금의 용인 풍덕천에 이르자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며 영정이 날라가더니 인근 모현 능원리 현재의 묘상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이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는데 이 자리는 우연스럽게도 연안이씨 묘역입구이며 이러한 기록의 이면에는 이방원의 악랄한 눈을 속이기 위한 궁여지책중 하나였을 것으로서, 그 역사의 이면에는 이러한 곡절이 추상된다.

당대 거유이자 이성계와 상대할 수 있는 지도자 포은 선생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경기근교에 안전하게 모시게 하고 이 위치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들의 집결지로 이방원과의 재대결을 위한 의미있는 재포석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역사의 이면이 역사에 뭍이고 말았지만 뜻있는 당대 인사들의 글에서 간간히 당시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오백년역사는 왕군수호(王權守護)와 신권신장(臣權伸長)의 갈등을 겪은 역사로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신권이상주의 정치를 향한 일념이 꾸준하게 이어온 역사로 부연되고 있다.오늘의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신속히 받아 들이고 독제군주를 탈피하고 개혁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바탕역시 포은의 새로운 도학정치를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에 기초를 두었으므로서 더욱 빨리 성정할 수있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추고컨데 터무늬없는 핑계를 잡아 대가문을 억지 모함을 걸어 금고처분하는 것도 이러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신이 타고가던 교자에 포은의 남루한 시신을 수습한 그 재상역시 연안이씨중 한 분이었다고 원운곡기록에 있었다고하나 그 운곡의 후손이 태워 버렸다하며 기록에 원운곡이 용인 구수동구 시미리 쌍훼나무마을 어귀에 머뭇거리며 당대 의기지사와 교유하며 남긴 글에서 보더라도 당시의 민감한 상황속에서 노출되어서는 않될 이러한 기록을 재대로 남긴다면 화를 당할 우려도 있어 구전으로 전하는 일외에는 추측일 뿐이다. 당시상황으로 보아 정몽주의 시신을 누구하나 용기있게 수습할 수 있었던 의인이 드물었고 그 시신조차 누구의 땅에 보안하는냐하는 문제도 서슬퍼런 이방원의 세도하에 생명이 좌우되는 문제이므로 아무도 이를 감행할 용기가 없으리라는 점은 지금이라도 역력하게 상상할 수있다.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해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역사의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성독곡(成文景公 石璘)의 文集에

高靈郡夫人金氏(묘 용인 구수동)의 輓詩가 실렸는데 김씨부인은 춘천부사공의 모친이다.

宅近常同井 (택근상동정) 우물물을 함께 길러 마시며 가깝게 이웃하여 살았고

門高幸接葮 (문고행접단) 사돈지간 어려우나 벼슬길 같아 왕래는 깊었다네

有無能共里 (유무능공리) 부귀빈천 가리지 않아 있고 없음을 차별 않으니 

慈惠最宜家 (자혜최의가) 언제나 은혜롭고 자비스러움이 뛰어난 집일세

光景隨流水 (광경수류수) 빛나는 그 모습은 흐르는 물처럼 평탄하더니

音容惜洛花 (음용석낙화) 애석타 그 음성과 그 자태는 꽃잎처럼 살아지네

百年偕老願 (백년해로원) 내외분 백년해로를 모두들 바라고 바랐건만

丹旐夕陽斜 (단기석양사) 붉은 깃발 석양빛에 아득히 기울고 마는 구나

  연안군의 징손이자 별좌공의 손자 현감 유(愈)와 동생 교리 희(熹)와,직제학(直提學) 말(土末 : 귀산의 현손, 인문의 아들)의 손자 주(澍)는 명종(明宗) 때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가 증( 曾)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佛敎)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으며,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지냈다.
  주의 아들 광정(光庭)은 선조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가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특히 그는 선조(宣組)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그 곳 천주교 선교사가 만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구해 가지고 들어와 한국사에 있어서 지리관(地理觀)의 대혁명을 일으켰다.
  광정의 아들 현(示玄)은 한국 재정사(財政史)에 있어서 정치능력을 가장 높이 평가받은 임물이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사위로 광해군(光海君) 때 삭직당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전적(典籍)에 등용되어 전조(銓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으 병참(兵站)과 속환된 피로인(被虜人)들의 구호정책을 비롯하여 관향사(管餉使)로 나갔던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그의 수완을 크게 평가받았었다.
  그의 아우 분(示分)도 병자호란 때 병참에 유공하였고, 주( )는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척화소(斥和疏)를 올려 이름을 덜쳤다. 인조(仁祖) 때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상소하고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완(示完)의 아들 봉징(鳳徵)은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비(廢妃)를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박태보(朴泰輔) 등과 더불어 <삼간신(三諫臣)>으로 불리웠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청백리(淸白吏) 인충(人忠)의 현손(玄孫) 지남(至男)은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다. 연안(延安)의 읍호(邑號)인 <영응선생(永膺先生)>으로 불리웠던 그는 그의 아버지 언침(彦 )이 장령(掌令)에 있으면서 조정에 거슬린 바른 말을 하다가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좌천되자 따라가서 그 고을에 있던 하서(何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옛날에는 위독한 사람의 똥맛이 쓰면 살수 있고, 달면 죽는다고 하여 효자들은 똥을 핥아 맛을 보는 풍습이 있었다.「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지남의 어머니 안씨(安氏 : 홍문관 박사 안한영의 딸)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게 되자 지남이 그 똥을 맛본즉 달고 매끄러우므로 목욕을 하고 하늘에 호소하기를, 자기 몸으로 모친의 죽음을 대신할 것을 빌었다.
  안씨의 꿈에 신인(神人)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말하기를 "네 아들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미 그로서 죽음을 대신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어머니 병간호에 몸이 몹시 상했던 지남은 마침내 피를 토하다가 나이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남의 아들 기직(基稷)이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산중에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못하다가 머리털이 희어지고 눈물에 젖어 눈언저리가 썩기까지 하였다. 다음해 봄에 곡(哭)을 하던 중 숨이 막혀 스러져서 아우 기설(基卨)에게 "나의 불효로 친상을 마치지 못하니 부업(父業)을 계승해 달라"고 유언하고「중용(中庸)」에 있는 선(善)을 택한다(擇善)는 귀절의 뜻으로써 간곡히 부탁하고 죽었다.
  기직의 아우 기설도 부친상에 7일 동안 단식을 하였고, 눈물이 다하자 불그스레한 혈루(血淚)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발인(發引)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 떼가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짓는 기설의 모습을 보고 그 효성에 감격하여 돌아갔으며, 적성(積城)에서 상여에 불이 나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이 죽음을 면했다.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와 돈서(惇敍)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저과 대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로써 지남과 그의 처 정씨(鄭氏), 지남으 아들 기직과 기설의 형제, 딸 이씨, 지남의 손자 돈오와 돈서, 돈서의 처 김씨 등 8개의 정문(旌門)이 내려져서 <연안 이씨 8홍문>의 영예를 얻었으며, 기설의 손자 후정(後定)은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충신(忠臣) 정려가 내려져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연안 이씨 또 다른 인맥인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의 후손에서는 9세손 석형(石亨)이 뛰어났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삼각산(三角山) 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마침 금성(禁省)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에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더니 흰 용(龍)이 바위를 조개고 나왔었다. 꿈에서 깨어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아들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고 한다.
  나이 26세에 생원·진사와 문과 초시(初試)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해 잇달아 삼장(三場)에 장원하여 정언(正言)을 지내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漢城府尹)·호조 참판(戶曹參判)·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지낸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월사(月沙) 정귀(廷龜)는 6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尹根壽)으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仁祖) 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명(明)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 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글씨에도 뛰어나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 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졌고, 그의 아들 명한(明漢 :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냄)과 소한(昭漢 : 이조 참판을 지냄) 현제가 유명했다.
  인격(人格)과 시재(詩才)·효행(孝行)의 삼절(三絶)로 불리웠던 명한은 10세 때 <월교교(月皎皎)>란 시(詩)를 지어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등 명시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궁성농추사(宮聲弄秋思)>란 글제로 짓게한 <월교교(月皎皎)>를 옮겨보념 아래와 같다.

    달빛이 산창(山 )에 희게 밝으니(有月皎皎兮山 )
    돌 누각이 가을의 생각을 움직이네(動石樓之秋思)
    청려장(靑黎杖)을 짚고 긴 파람하는데(植藜杖而長嘯)
    사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있네(人有影於柴扉)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잃어버렸는데 어떤 군사가 물가에서 주었다가 10년 뒤에 돌려주었기 때문에 문집 9권이 전해졌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도 뛰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들어간 지 수일만에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여, 호군을 피해다니다가 길 곁에 흙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그 속에 모시고 자신은 문 앞에 누워서 몸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활줄을 당겨 한참 보더니 흙집 안에 노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효행에 감동하여 그냥 돌아갔다.
  명한(明漢)의 아들 단상(端相)은 인조(仁祖)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효종조(孝宗朝)에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간(臺諫)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고, 학문이 뛰어나 「대학집람(大學集覽)」·「사례비요(四禮備要)」·「성현통기(聖賢通紀)」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한국유학사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상의 아우 가상(嘉相)도 효행이 뛰어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여섯 번이나 적에게 잡혀 끝내 살해당했으며, 조부(祖父) 월사(月沙), 아버지 명한(明漢)과 더불어 <삼대 대제학(三代大提學)>의 전통을 세웠던 일상(一相)은 청(淸)나라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효종)의 북벌계획 수립에 도움을 주었고「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류성룡(柳成龍)을 도왔던 귀(貴)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공을 세워 정사1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올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 괄(李 适)의 난과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살면서 훈공을 세웠던 충신으로 유명했다.
  귀의 아들(時白)은 효종(孝宗) 때 좌의정으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寧議政)에 올라 명망을 떨쳐 연안 이씨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의 아버지 귀의 충정에 보답하는 뜻에서 임금이 내린 집에서 살았던 시백은 마당에 전부터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어느날 시백이 하직(下職)에 있을 때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왕명이라 하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했다. 시백은 아무말 없이 꽃나무 곁으로 달려가 뿌리까지 뽑아 버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 저녘으로 험악해져 가는데 임끔께서 어진 인재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 하시려는 건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기개에 느낀 바 있었던 임금은 시백을 중용(重用)하였다고 한다.
  시백이 병자호란 직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데 평양 대동문을 들어서니 화려한 기생의 무리가 접대를 하였다. 병란 후에 서도(西道)에 탕진이 흑심한데 이 화려한 접대에 놀라 그 사유를 평양 서윤(平壤庶尹)에게 물었다. 그 서윤은 사신행차에 항상 체통을 못이루고 있어 각 고을의 관비(官婢) 중 자색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이게 하고, 그 복색과 비용은 그들 친족으로 하여금 부담케 함으로써 관비의 손실을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시백은 성내어 "서윤을 설치한 건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하며 호통을 치고는 감사를 불러 시정을 명하고 떠났다.
  어느날 시백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무명방석 하나를 만든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시백은 퇴청 후 뜰 아래 부들자리(망席)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옛날부터 깔던 자리는 바로 이 부들자리요, 내가 풍운을 만나 외람되게 공경(公卿)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겨지며 실폐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서 망하기를 재촉하단 말이오"하자 부인은 당장에 그 비단실을 뜯어버렸다는 기록이「공사견문(公私見聞)」에 전한다.
  만년에 효종(孝宗)이 왕세자와 시백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이를 보기를 너의 팔다리(股肱)처럼 여기고 위하기를 나같이 하라"고 유언하였다. 일찍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시백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를 알면 그를 믿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묘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시백의 아우 시방(時昉)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아버지와 함께 공(功)을 세워 정사2등공신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시직(時稷)은 병자 호란 때 강화도에서 국운을 통탄하고 유서를 남긴 후 종으로 하여금 목을 조르게 하여 자결했다.
  통레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의 후손에서는 그의 현손(玄孫) 보정(補丁 : 예조 참판을 역임)과 말정(末丁 : 예빈지 소윤을 역임) 형제가 뛰어났고, 말정의 아들 숙기(淑琦 : 이조판서)와 숙함(淑 ) 형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유공했다.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후백(後白 : 숙함의 증손, 국형의 아들)은 옳은 일과 결백함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중손 호민(好閔)은 선조(宣祖)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니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고,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특히 그는 검소하기로 유명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비단옷 한 번 입지 않았다. 선조가 어의(御衣)를 하사(下賜)할 때도 호민에게만은 무명옷을 내렸다고 한다.
  전란이 끝날 때마다 서로 녹훈(錄勳)을 하려고 위증을 해가며 법석대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에도 웬일인지 녹권을 받은 자가 조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에 무관심한 호민에게 이덕형(李德馨)이 희롱하며 "공은 어디 갔다가 정승이 되지 못했소"하였더니, 호민은 "공은 어디 갔다가 공신이 되지 못했소"하였다. 그후 이 아름다운 대화는 전후 때마다 일어나는 시대의 풍조를 익살하는 명귀로 곧잘 인용되었다고 한다.
  정조(正朝)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김해 부사(金海府使) 중길(中吉)의 손자 술원(述源)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정희량(鄭希亮)에게 죽음을 당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술원은 거창읍의 좌수(座首)로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역장(逆將) 정희량 앞에 나아가 "너의 조상은 그토록 나라에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무엇이 모자라 이런 수작이냐. 너의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호통치다가 무참하게 난도(亂刀)질 당했다.
  술원은 아들 우방(遇芳)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우두령(牛頭嶺)에 올라가 적 틈에 잡혀 있는 거창 시민에게 포고를 하였다. "거창군민은 나의 말을 들어라. 역적 희량에게 붙어 있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 요, 희량을 잡아 오진(五陳)에 데려오면 조정에 품하여 녹훈을 할 것이다." 군민들이 밤중에 정희량의 거소를 습격하여 희량을 묶어 우방의 진용에 데려오자 난이 평정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시원(始源)의 아들 봉수(鳳秀)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정조(正祖)로부터「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고 권학(勸學)의 격려를 받았으며,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지수(趾秀)는 순조(純祖) 때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世子)에게 학문을 진강했다. 또한「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지내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약우(若愚), 석농체(石農體)의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던 종우(鐘愚),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자결한 현섭(鉉燮),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약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던 도재(道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던 설( ) 등이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동녕(東寧)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페기운동을 전개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가 되어 국무총장을 겸한후 대통령 대리가 되어 의절(義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이씨를 더욱 빛냈다. 

 

  투수남행 (投綏南行)

극악한 압제와 모질고도 끈질긴 질곡의 세월을 보낸 흔적도 아직까지 남아 있고,

이성계 이방원의 아들 손자가 권력을 악착스럽게 전단해온 500년비운의 역사에서도 오로지 인간다운 역사에 충실하기 보다는 권력에 아첨하며 살아아 온 풍조가 휩쓸었고, 이러한 사실을 온갖 미사려구로 호도(糊途)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풍토에서 그나마 모진 세파를 지혜롭게 헤어나며 인간다운 기백과 정신을 이어 오늘의 떳떳함을 보여주신 조상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이 조선땅에 매우 드물것이다. 이와 견줄만한 사연이 다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別坐 (李 垙)公은 燕山君의 妻家가 거창愼氏로서 종동서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공은 스스로 호를 半聾齋라 하여 벼슬길을 스스로 삼가 하셨다. 佔畢齊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寒喧堂 金宏弼과 同榜 生員을 하셨다.

역사기록으로 볼때 연산군은 점필제 김종직 문하의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무오 갑자사화(戊午 甲子士禍)이후부터 용인 구수동에 은거하여 지냈다. 폭군 연산군이 누차 불렀으나 스스로 반농제(귀먹은 이)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못들은 척하여 지내시다가 용인에서 돌아 가셨다. 거창신씨 일가가 전부몰락하는 상황에서 공 내외분은 오로지 학문조차 폐하고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하시다가 한양 100리 밖 조상묘하에서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이러한 기개는 조선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이어지며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자부하고 있다.

한편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별좌공공의 장인 신승복과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별좌공(垙)은 연산군과의 처가로 종동서간이지만 한편 친가로는 바로 아래 아우이신 연성군(坤)은 연산군을 몰아내어 그글 귀양지까지 안치시킨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서 중종반정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공신이 되었는 바 바로 아래 친동생되시는 분이 졸지에 공신이 되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벼슬에 오르는 길보다는 초야를 선택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특히 별좌공(광)의 차자인 교위(위수)공은 낙남(落南)하여 처음에는 예천금곡에 덕천당(德川堂)을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쓰시는 한편 안동 절강 무릉(浙江 武陵)에 이르러 무릉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당시 영남일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매촌(愈), 율리(熹), 눌헌(應),등 삼형제를 퇴계문하에 보내어 훌륭한 도학을 잌혀 후일 나라의 위기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란 불가항력적인 전란에 임하여 수령들이 겁을 먹고 버리고 간 예천고을을 당시 용궁현감에 계시면서 예천성을 수성하였지만 재차 삼차 공격을 해온 적과의 예천성전투에서 전 가족도 함께 몰사하는 변고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매촌공) 한편 왕을 호종하던 차에 삭녕지방에서 적을 만나 항전하시다가 순절하신 분(율리공),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지역을 방어하시는 등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고을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쓰셨고(눌헌공), 전란이후에 겨우 수습한 가솔을 거두어 지금의 예천 송곡에 처음으로 자리를 정하였다

校衛公 (李葳壽)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투수-投綏)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 (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면 송곡동)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갖이시고 세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공의 맏 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

梅村 공(李 愈)>

자는 子欽이요 호는 梅村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栗里, 訥軒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生員進士에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문인으로 나아갔다.

퇴계선생의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연안인(延安人)으로 醴泉出生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히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궁 정재령(政在嶺)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雪泲爲誓衝冒矢石)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에 움직일 수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토적(土賊)을 잡아 一郡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金晬)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자는 자수인데 첨추(僉正벼슬과 中樞府使를 지내신)仁文公의 曾孫으로 수를 72세라“ 이록한바 있고 또한 ”泰川縣監 재임시에 廉使 漢陰(文翼公 李德馨)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表裏衣襨)을 하사하였다”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安集使 伯巖 金訒(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前縣監 李愈로하여금  醴泉을 지키고 土賊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李 愈)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醴泉邑誌(懶隱 李東標찬-숙종때 인물 솔무덤에 유적이 있음)에는 ” 李愈는 義兵將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陣中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없어 그의 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朝鮮 名臣錄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였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在野人材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襨)를 받았다.고 하였다. 기록은 중복되지만 아직 정사에 기록이 누락되어 부득이 여러 지료를 모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증명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며 이러한 기록은  세첩보유( 눌운 이병화 편)에서 참고한 것이니 앞으로 공의 기록은 사실에 상당한 기록으로 유의하기흘 바라는 바이다.

무릉정 현판을 걸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분 아우님,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訒 鄭元黙 李景嶔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 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 (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 아우분을 합하여 수물한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저 있어 오늘 날 까지 보존되어 왔다.(*내가 이글이 실린 강친계첩을 모고 본 그대로 적지만 글솜씨가 부족하여 다 못 적는다, 이관희)

공은 明宗이 정묘 6월에 붕하여 넉달이 지난 10월에 장례를 지내고자하는 왕대비의 고집을 꺾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장일을 바로잡은 일은 율곡집에 있는 바 율곡(이 이)도 공이 이를 분명하게 밝혀 대왕대비 윤씨의 판단을 옳게 하므로서 조정대신들 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은 공이 성리학 이론에 매우 투철하였음을 입증하는 면을 보여 준다.

공의 묘소는 예천호명산 선고비 묘하 동록에 모셨으며 배위는 문화류씨로 묘소는 함께 모셨다.

공의 후손은 1녀 진사 李淸(진주인 자 海益 녀 柳澤 진주인 문정의 여 金繼光) 를 두시고 후일 判事(德承 생부 應 묘 안동 임북 세천산 눌헌공 영 후록)공을 계자하였으나 판사공은 三녀와 서자 三인을 두셨는데 서자인 英男공이 아드님(碩) 한분을 두셨으나 族譜상으로 이어 오지 못했다.  후일 을사,갑술,계유보 수단시에 누락되었던 것을 경신보 수단시에 광주상애곡(廣州桑厓谷)에 族人 이 거주하는데 공의 후손(석)과 같은 단자를 보소에 내었기로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돌려 보냈더니 후에 교정공(弘老)의 후로 투탁하였다고 하나 족보와 이조실록에 기록을 비추어 교정공 후손은 불명하다. 사평공파의 휘 碩이 곧 그 사람들이다.

栗里 공(李 熹)*참고자료 율리공 글 모음
    

자는 자수 호는 율리이다.중종 27년 임진(1532)생이 시고 명종 16년신유(156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7년갑술(1574)별시 문과에 올라 상주교수, 경상도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에 이르고 태상첨정을 지냈으며 퇴계문하에서 수업하엿다는 기록은 퇴계언행록에  있다.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

퇴계선생 문집중에 이자수에게 보낸 편지가 두통있는데 퇴계선생은 성리학에 대해 매우 간곡하게 설명하신 흔적과 안부를 교환하신 정감어린 내용에 후세인들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준다.

공은 선조 3년 신미(1571)12월 퇴계선생 기세시에 제문을 올렸는데

“...실로 선생은 공자와 기자 이후 도학을 더욱 세롭게 다듬은 진정한 1인자로 추앙하여야한다”는 극찬을 시작으로 퇴계선생의 공적을 지극히 높힌 바 있어 후일 중원의 학문일지언정 동방에서 비로소 대성을 이룬 퇴계선생의 공적을 올바르게 표현한 자강자주적인 표현의 효시(自疆自主的 表現 肴示)가 된 것이다.

상주향교 도선생안(道先生案)과 국조방목(國朝芳目)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반복하어 기록하고 있으며, 공은 임진란에 임금을 모시고 북상하던 중 삭녕지방에 이르러 적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는 기록도 이상의 서면에 함께 올라있다.

참으로 퇴계는 그를 알아주는 제자를 많이 두었지만 그중 공과 같은 제자가 천명을 극복하여 오래하였더라면 더욱 그 빛나는 명훈을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렸으리라 매우 한탄스럽도다..

묘소는 매촌공 묘하에 모시고 배위는 원주변씨(원주변씨 부는 응녕 조 참봉 관 증조 필대 외조 문억형 본 감천)이며 묘소는 공의 묘소와 같이하였으되 상하분이다.  의성김씨 연방세고(義城金氏 聯芳世考)에 보면 능천서당을 함께 세웠다 하였다.

능천서당(能川書堂)은 공께서 예천 금곡에 계실 때에 남악공(김복일)과 같이 능천서당을 이르켜 후학을 가르켰다고 하는 기록이 남야집(박손경)에 있다, 이 남야집에 기록하였으되 “금곡 북쪽에 옛 덕진숙사가 있었는데  여기에 글은 첨정공이 짖고 글시는 남악공이 썼다“하였고 남악공 자손이 이것을 오늘에 이르기 가지 보관하여 왔다는 요지로 기록을 하였다.

동국씨족고에 “..(앞에 중복기록 생략) 배위 원주변씨가 무자하여 재종질 북백공(昌庭)을 어릴때부터 길러 왔고 후사를 마낄려고 하던차  임진란이 일어나고 공께서 뜻밖에 일을 당하여 돌아가시자 북백공은 3년의 상을 입고 양자의 예를 다하였으며 갑오년에 도 원주변씨께서 돌아가시니 북백공이 교위공선영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예를 올렸다고 하였다.

식산집(이만부-李萬敷)에 가정전례로 알려진 글을 인용하면 "후사까지 부탁하시던 족부 첨정공의 일로 상심하여 직접 시신을 수습하여 모셔 오고 선고묘하로 장례를 지내고 3년상을 입었으나 장차 후사문제를 고민하였으나 다시 친가로 환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용주 조경이 천한 북백공 신도비에도 남아 있다.

생각건대 식산집에 공의 제사를 모실 사람을 종인이면 누구나 좋겠다고 하면서 북백공이 이를 정하고 스스로 파양하엿다는 기록은 다소 생각해볼 문제다. 첨정공은 순절직전까지 자식이 후사가 없어 북백공 (창정)을 양자로 미리 정하여어릴대부터 길러 왔던 것이 기록에 분명하며 공이 순절하신 임진년부터 그 다음해인 갑오년에 숙인 원주 변씨께서 돌아 가셨는데 11년이 지난 을사보수단시에 첨정공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되었으니 이는 첨정공 후사가 확실히 북백공이후로 단절되었음이 ,더 이상 논난의 여가 없는 것이며 후일 북백공의 손자이신 관찰공 (근곡 이관징)께서 친히 호명 송곡 종택에 오셔서 사당을 짖고 제향을 드린 바 있고 또한 첨정공의 필적이 동애공(浹)사손의 집에 보관되어 왔다는 사실등을 참고해 보면 첨정공은 한성에서 사시던 마을이 율리이며 피란처이던 문경청화산 율수라던지 한성 서문밖 서강의 율도등을 관련지으면 첨정공의 호와도 관계가 없다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니 첨정공의 자손은 북백공이 스스로 철양함으로서 그 후대 사손이 없게 되고 연안이씨 종인이면 아무나 대를 이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는 것은 당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도리이며 이로서 족보상에 무후로 된 것이 틀림없다.

공이 이조좌랑시에 任百英, 柳希規, 李熹, 沈源河, 崔濂, 閔善, 朴以容, 柳凞緖 등과 더불어 여덟첩 비단평풍에 각기 시를 지어 친목을 결의한 병명계(屛銘契)가 있다. 병풍에 올린 시귀를 살펴본다.     

共 遇 祥 刑 世 「서로 만나 세상을 본받으니 반갑고」

同 爲 大 理 官 「다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네.」 

金 蘭 成 勝 會 「친구우정  나누는 오늘의 잔치에」

樽 酒 得 團 欒 「술잔을 높이 들어 더욱 다짐하세나」

要 解 三 年 旱 「공부 쌓던 힘든 세월 비로소 알겠구려.」

何 妨 一 日 歡 「오늘하루 즐긴들 뉘라서 어찌 하리」 

異 時 相 憶 處 「오늘 말고 다른 날 서로 보고 싶을 때는」

留 列 短 屛 看 「해어지며 나눈 이 평풍을 바라보세나   

안동 절강 武陵亭에 간판을 올릴 당시 지으신 싯귀

島下淸江江上棲  繞原紅樹自高低   纖埃不起房櫳靜  啁哳聲聲夜半雞

최근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공은 대왕대비가 불교에 대한 편애로 인하여 국가기강이 문란해짐을 비감하여 상소한 자료가 발견되었기로 별도로 이 자료발간을 위한 작업을 추진중임을 첨언하며 공에 대한 기록이 이외에도 당대 유명한 사대부들과의 교유한 기록등과 특히 퇴계선생과의 사제간 주고 받은 편지내용등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으로 이오에도 무수히 많아서 이루다 적지 못함이 아쉽다.

 訥軒 공(李 應)

자는 子期 號는 訥軒이다. 중종 32년 병신(1536)년 생이 시다. 선조 3년 경오 (1577)년에 사마시에 오르고 선조 8년을해에 수천으로 통례원인의에 오르시였다.매촌공 율리공 백중형과 함께 퇴계선생문하에서 수업하셨다.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

도산문헌록에 “공은 매촌 율리공의 아우이시며 벼슬을 버리고 안동 무릉도 에 복거하여 김약봉(극일) 김학봉(성일),황해월(여일),이몽제(안도),김운천(용),손삼성재(흥례),등 당대 선비들과 더불어 시읇고 글을 짖으 문장을 닦았다” 하고

양양지(양양지)에 “공은 예천 사곡에 계시던 중 늦게 안동절강강상에 도화곡에 작은 정자를 이루어 무릉이라 편액을 달고 지내셨는데 칠언절구 일수를 남겼다”.

당시 무릉정에 액자를 걸면서 지으신 싯귀

幽居自分一枝棲  松下茅簷不剪低  棊局罷來無箇事  更呼童子護雛雞

이뿐 아니라 당시 여러재사들과 주고받은 싯귀가 부지기수이다.

임진년을 당하여 매촌공은 예천에서 율리공은 삭녕에서 변을 만나 돌아가시고 공게서도 전쟁이 긑나던 그해 정유년에 예천송곡에서 세상을 버리시니 아드님 사고공(덕창)이 절겅리에서 예천으로 거처를 모두 옮기게 된 것이다.

“절강 백여리에 전쟁의 소용도리가 지나가니 마침내 사람의 종적이 간데 없다“하는 글을 어느 시인이 읊은 기록을 보았다.

   浙江百餘里一區 雲物管領無人處

을사년(1905) 봄에 공의 운손(雲孫-9세손이후의 자손)(炳華)公이 嗣孫(炳奎)공과 합의하여 무릉정을 사곡촌 후봉 건지산밑으로 옮기는데 편액은 당대 명필 해사(海史-김성근)가 썼다. 편액의 글씨는 미양궁체(米羊宮體)이다.

柳田園(道獻)이 重建記를 쓰니 이르기를 “士君子(사군자)는 마땅히 그 스승을 보아 그 행처를 짐작하는 것이라 하더니 退溪先生의 弟子다움에 있어 뛰어남이 첫 번째로 訥軒 李先生을 두고 한말이라 할 것이다.“ 하니 공이 浙江上 桃樹谷에 亭子를 짖고 當代名儒들과 함께 토론하고 詩書를 논하여 交遊하였으며 임진란을 당하여 伯仲二公과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충심갈력하신 바는 후세에 널리 알려저 있으매 이제 황량하던 그 자리를 떠나 9세손 愛吾窩公(鼎基)의 명에 따라 雲孫(炳華-스스로 號를 訥雲이라함)가 嗣孫 (炳奎)와 합의하여 고향땅에 새로이 이르켜 세운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하였으며 눌헌선생의 의표를 본받아 자손만대에 이어 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上樑文은 十一世孫 訥雲公(炳華)에 의하여 올려 젔다.

   수장충혼(水葬忠魂 快葬魚腹)

동해바다에 배를 갈라 창자를 뿌리였건만 조국을 향한 충정을 해아리는 자 없고

이엽-李曄은 강호공의 후손으로 억복(億福)의 장자이며 용인 하동촌 출신이다.

무과급제로 금성현령을 지내더니 임진왜란을 만나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로 참전하여 한산전투에서 가등청정에게 사로잡히자 왜의 본영까지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을 받아 해중에서 스스로 배를 갈라 자결하며 바다로 떨어졌다.

이 기록은 서애 유성룡의 단구록(丹舊錄)과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 있다 한다.(1694년(숙종20년) 갑술보에는 불록이나 1813년 계유보에 기록을 근거로하여 자료를 살펴 본즉 서애(柳成龍)공은 한(漢)때 이릉의 고사를 인용하여 농서대장부(隴西大丈夫)의 기개를 높혀 그 충절을 기리는 글을 정성을 다하여 기록하였고, 존경록에 공의 현손 세온이 가져온 고지(古紙) 한통을 근거로 자료를 상고하였다 하며 위 기록과 아울러 강항(姜沆)이 간양록에 공을 위한 칠언절구를 남겼더라.

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내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

그 옛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

한나라 이릉장군 생각마저 돋는 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


훗날 100여년이 지난후 공의 현손 세온(世溫)이 가저 온 고지의 내용을 상고하면 아래 와 같다.

“나의 고조부 엽(曄)은 임진란 중에 전라좌병(사)의 우후(虞侯)로서 한산도 싸움에서 패하여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히니 청정이 항복하라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관백(關伯)에게 압송하여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상으로 비단등을 많이 주었다.

공은 함께 잡혀온 우리 백성 수십여인과 약속하고 선물을 흩어 팔아서  그 돈으로 배를 구입 고국으로 가고자 배를 타고 도망치는데 지키던 왜군들이 이를 발각하고 뒤 딸아 양면으로 협공하며 오는 지라 미리 차고 있던 칼을 뽑아내어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바다에 스스로 뛰어 들어 자결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왜놈들은 다시 공의 시신을 바다에서 끌어내어 환열(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형벌)한 뒤에 거리에 걸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숙종때 상소하여 추증으로 증병조참의를 받았다.    

또 다른 자료(난중일기 정유년 7월16일-이순신 충무공)에 이르기를

“.....더욱이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이때의 상황은 왜군이 다시 재침하는 과정에서 이를 초개하던 선장 이엽장군이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 등지에 숨어 있는 왜적을 일일이 찾아내어 무찌르고 도망하는 그 잔당을 도륙하려고 배를 몰고 바깥바다로 나가던 그 때 마침 1000여척의 왜선이 재침하여 오자 강한 물살에 미처 배를 돌이키지 못하고 적에게 사로잡히게 된 경위를 자세히 적은 이순신이 친히 적은 기록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정유년(1957) 7월16일 을사(양력8월28일]

저녁에 염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사집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5일에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 왔다가 7일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니,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내어 불 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천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살육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마저 이와 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고, 더욱이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팔홍문가(八紅門家)의 13 연세정려(連世旌閭)       

 (기록: 政熙(첨사공 27세손)  盛永(부사공 22세손))

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조에서 관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귀감이 청백리(淸白吏)라면 일반(臣民)에게 윤리적 귀감이 되는 것이 정려이다.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절부·열녀를 표창하고 그 징표로 그 집이나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 紅門)을 세워 널리 알리고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 연이(延李) 가문에는 많은 정문이 세워졌지만 그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팔홍문집(八紅門家)」라고 알려진 집안에 6세에 걸쳐 연세로 13개의 정문이 세워진 것은 우리 연이(延李)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팔홍문가의 13 연세정문의 발단은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있던 이언침(李彦忱)이 조선 인종 1년(1545) 소윤(小尹: 조선시대 당파의 하나)의 비위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몰려 명종 원년(1546) 을사사화(乙巳士禍: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낼 때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사건)에 연루시켜 순창군수로 좌천되었다가 2년 후 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시켜 서천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죽었는데 그 부인 광릉안씨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시부모와 부군에 대한 지극한 정성의 절조있는 처신으로부터 시작된다.
1) 광릉안씨(廣陵安氏: 언침의 처) 절부(節婦)
2) 지남(至男: 언침의 아들) 효자(孝子)
3) 동래정씨(東萊鄭氏: 지남의 처) 절부
4) 기직(基稷: 지남의 장자) 효자
5) 기설(基卨: 지남의 차자) 효자)-<효자삼세> 인조 어필 사액이 하사됨
6) 연안이씨의 처자(지남의 딸) 효녀
7) 돈오(惇五: 기설의 장자) 충신(忠臣)
8) 광주김씨(光州金氏: 돈오의 처) 열녀(烈女) - 인조 어필

또 숙종 32년(1706)에 기설의 차자 9) 돈서(惇敍)의 충신(忠臣), 기설의 3자 돈실(惇實)의 처, 10)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절부(節婦), 11) 영조 7년(1731)에 돈오(惇五)의 4자 후성(后晟)의 효자(孝子), 12) 돈서(惇敍)의 4자 후잠(后潛)의 효자(孝子), 13) 영조 18(1742)에 후정(后定)의 차자 상기(相琦)의 효자(孝子)가 정려됨으로써 110년 동안 6세에 걸쳐 충신2, 효자효녀7, 절부3, 열녀1, 합계 13개의 정문이 세워진 것이다.
최초 정려된 이듬해인 인조 12년(1634)에 김포 사촌(沙村: 사우리)에 정려각이 세워져 여섯 정려를 봉안했다가 인조 15년에 소실되었다.
숙종 17년(1691)에 다시 김포에 8정려를 봉안하였다가 영조 10년(1734)에 서울 남문밖 자인암(紫姻巖)에 8정려각을 이설하였으나 가세 빈궁하여 영조 39년에 다시 김포 사우리로 옮겼는데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영조 40년에 다시 서울로 모실 것을 명하여 정조 6년(1782)에 다시 자인암에 8정려를 봉안하고 11년에 정려각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여 조선조 말까지 유지되었다.
일제에 들어 정려각 자리가 철도부지(서울역)로 지정되면서 종로 운니동으로 이전 봉안하다가(연도미상) 파주 적성(積城) 마지리(馬智里)에 충현공(忠顯公 諱 惇五)의 사당과 8정려각을 함께 신축하여 봉안하였는데 한국전란으로 소실되었다.
1968년에 남양주 진건면 신월리(新月里)에 충현공 묘역에 8정려각을 재건하였으나 붕괴되어 1984년 8월 18일 김포시 감정동에 13정려각으로 확장 복원하였다.
팔홍문(八紅門)의 집안에는 8홍문으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서 3세에 걸쳐 5정문이 추가로 세워진 것이다.

제1문 절부 광릉안씨(언침의 부인)
광릉안씨(廣陵安氏)는 장령공 이언침의 부인으로 홍문관 박사(博士) 광릉인 안한영(安漢英)의 둘째 딸이다.
안씨는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는데 언니 안씨도 절부로 정려된 바 있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나고 효우(孝友)하는 행실이 자연히 들어나 언니가「방씨여교(方氏女敎)」를 읽는 것을 보고 배우기를 자청하여 소학과 열녀전 등 책을 다 배우고 행동을 한결같이 본받았다.
을사사화 때 장령공(남편)이 억울하게 귀양가서 적소에서 돌아가시니 안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슬픔에 복바쳐 숨이 끊겼다. 깨어나고 피를 토하는 슬픔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웃사람들도 사화를 두려워하여 장례에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있는 전답을 처분하여 장례를 무사히 모시었다. 이러던 중 하루는 안씨가 말했다. “여자로서 묘소를 지키기가 어려우니 제사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하며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살아있을 때와 같이 정성으로 올렸으며, 자기는 3년 동안 죽을 쑤어 연명만 겨우 했다. 시어머니께서 크게 걱정하고 밥과 나물을 권하여도 목이 메어 먹지도 못하였다.
그는 남편을 여읜 죄인이라 슬퍼하고 겨울에도 화로 불조차 쬐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30여년 시종일관 남편만을 사모하며 지냈다.
그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80노령으로 별세하시니 안씨는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시어머니마저 잃으니 남들이 말하기를 ‘3년상이 지나면 아마 자진할 것이 아닌가?’하며 걱정들을 하였다. 70이 넘어서도 기일만 되면 “내가 나이 늙어 다음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하며 친히 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올리니 그의 절행이 이웃에 본받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안씨는 1633년(인조 11)절부로 정려되었다.

제2문 효자 이지남
부친인 장령공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침식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부친의 별세를 슬퍼하였다. 더구나 이 때는 한참 당파싸움이 심하던 때이라 화를 두려워한 친척이나 친구들까지도 문상조차 없는 외로운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논밭을 팔아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친히 아버님의 광중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고운 흙으로 묘소를 마련하니 묘소의 면모가 반듯하였다.
그 곳에 여막을 마련하고 살아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곁을 떠나지도 않고 3년간의 묘살이를 하였다. 3년이 지난 후에도 밤낮으로 참배하고 길을 떠날 때는 하직인사, 돌아와서는 문안인사, 그리고 집에 조그만 일이 있어도 묘소를 찾아 일일이 여쭙는 것이 살아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병환으로 어머니께서 위태로워지자 어머님 대변 맛까지 보았다. 변이 달면 병이 위중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이 많이 달았다. 약을 구해 드려도 차도가 없었다. 침식을 잊은 채 목욕재계하고 울부짖으며 나를 대신하기를 청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선인(禪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대신할 것을 허락하였다.”하며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머니는 씻은 듯이 완쾌되었으나 지남은 허약해져서 피를 토하더니 효를 다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1663년(인조 11) 효자로 정려되었다.

제3문 절부 동래정씨(지남의 부인)
효자 이지남의 아내 정씨는 1530년(중종 25년) 승지 정원(鄭源)의 딸로 태어났다. 14세 어린 나이로 이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연소한 나이에도 법도에 따라 어른들을 극진히 공경하니 시어머님 말씀이 “신부의 효성은 비할 곳 없는 효부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처신을 잘하였다.
이 때 친정아버지 승지공과 시아버지이신 장령공이 함께 화를 입어 돌아가시니 시모님께 청하여 함께 모시고 살기를 30년이나 되었다.
남편을 잃은 정씨는 슬픔에 겨워 하루에도 죽었다 깨어나기를 몇 번, 피눈물로 세월을 보내니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정씨 부인은 죄인으로 자처하고 입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나 물건은 아예 가까이 하지를 않았다.
시어머니 초상 때는 아들 이기설(李基卨)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님과 너의 형이 불행하게도 일찍 별세하였으니 장례를 모시는 큰일은 그 책임이 나와 너에게 있다. 그러니 장례절차는 예법대로 행할 것이며, 그렇게 못하면 어떻게 너의 아버님을 지하에서 뵙겠는가?”하며 장식 패물을 모두 팔아서 장례비용을 마련하였다.
정씨부인은 거듭 슬픈 일만 당하니 많이 쇠약해져서 갈수록 병이 심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하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안이 화가 이에 이르렀는데 내가 죽는다면 어머님의 제사를 부탁할 곳이 없다.” 몸을 가누어 일어나 온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시곤 하였다.
1633년(인조 11) 절부(節婦)로 정려(旌閭)되었다.

제4문 효자 이기직
공은 참봉 이지남(李至男)의 장자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아 배운 대로 실천하는 드문 효자였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것은 물론이요, 차고 더운 것을 조절하여 편하게 해드렸으며, 부모님이 잡수시고 난 후라야 밥을 먹었다.
나이 20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밤낮으로 시신 옆을 떠나지 않고 7일간이나 입에 음식을 넣지 않았다.
산소를 정하는 일에도 간신히 기운을 차려서 지사(地師)와 함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깊은 산골까지 안 간 곳이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바람과 서리를 피하지 않으며 온 몸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함으로 지사도 감동되어 모든 정성을 다하여 명당을 찾았다. 모든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루고 난 후에도 제사는 물론,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묘소를 찾아 슬피 우는 것은 물론이요, 곡기라곤 조로 쑨 미음을 마시며 애통해 하니 날로 수척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은 상청에서 울기만 하다가 기절하여 죽으니 더욱 비참하였다.
1633년(인조 11) 효자에 정려되었다.

제5문 효자·청백리 이기설과 꿩(孝感雉)
휘는 기설(基卨),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이며, 1558년(명조 13년) 지남(至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축년(丁丑: 선조10년, 1577) 가을에 부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기설의 나이 20세라 밤낮으로 부친의 시체 곁을 떠나지 않고 식음을 전폐한 채 슬픔에 젖어 있었다. 장례를 모신 후에도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엄동에도 옷 하나만 입고 빈소를 지키며 피눈물로 슬퍼하였다.
장례 후에는 여막을 짓고 아내와는 서로 보지도 않으며 3년을 그렇게 지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어머니 정씨도 병환이 생겨서 매우 중하여지자 단지(斷指)로 피를 뽑아 약에 타서 마시게 하니 병환은 나았다.
형 기직이 모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육즙을 만들어 드리니 모친이 의심하여 먼저 맛보게 하였더니 기설은 육즙인지도 모르고 맛본 뒤에 모친에게 권하여 드시게 하고 물러 나와 그것을 알고 통곡하며 칼로 혀를 자르니 피가 흘러 입안에 가득하였다.
공은 무주현감에서 다시 송화연감(황해도 최서단)이 되어 기제사를 당하여 사람에게 꿩을 잡게 하였더니 잡지 못하므로 내 성의가 미진한 것이라고 문을 닫고 자책하였다. 그런데 새벽에 꿩이 대청으로 날아들어 이를 제수로 쓰게 되니 모두가 감탄하고 송화사람들은 지금까지 전하기를 그 꿩을 ‘효감치(孝感雉)’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 갑오년(선조 27, 1594)에 모친상을 당하니 슬퍼하기를 부친상 때와 같이하고 기설이 덕천군(德川郡)으로 발인하러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이 나와서 범하므로 기설이 영구를 지키고 슬피 우니 화적들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1601년(선조 34) 염근리(廉謹吏)로 피선되고 1633년(인조 11) 효자(孝子)로 정려(旌閭)되면서 인조의 친필로 ‘孝子三世’라 사액(賜額)을 하였다.

제6문 효녀 연안이씨 처자
처자(處子) 이씨는 참봉 이지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조용하여 함부로 보고 듣지 않으며 똑똑하고 인물이 빼어나 조그마한 티도 없고 이해력이 빠르며 말과 행동이 단정하며 엄전하였고 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깨우쳐 알며 가세가 충효로 전하여 몸에 배어 천품이 아름답고, 견문에 익숙하고, 천성이 고왔다. 부친상을 당함에 슬픔을 다하여 눈물이 피로 이르며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하였다.
3년간을 죽만 마시고 몸이 상하게 되니 얼마 지나서 처자도 죽게 되었다. 죽을 때 “내가 지금 죽어서 아버님 곁을 따르니 죽어도 유감됨이 없으나 다만 어머님이 살아계시니 그 불효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앞서감이 죄송할 뿐이다.” 말을 마치고 운명하니 그의 나이 18세라. 동리 사람들이 효녀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1633년(인조 11) 효녀로 정려(旌閭)되었다.

제7문 충신 이돈오(충현공)

충현공(忠顯公) 돈오(惇五)의 자는 자전(子典), 호는 일죽(一竹)이며 1585년(선조 18)에 나고 1637년(인조 15)에 순절하였다.
나라에서 선현의 자손이라 등용함에 이를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후에 광해군 6년(1622)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에 제수되었는데, 재직 중에 폐모론을 할 수 없다하며 사퇴하고 말았다. 공은 언제나 의(義)에 어긋나면 관직을 미련없이 버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비록 벼슬자리에는 있지 않다 하여도 사사로운 생각만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종사가 있는 강화로 찾아갔다. 이런 충정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훈련도감 낭청(訓練圖鑑 郎廳)에 제수하고 무기 공급의 일을 보고 있었다.
1637년 정월 갑자기 청군(淸軍)이 강화에 상륙하니 공은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나라에서 준 직책이 있어 나라와 함께 존망을 같이 할 것이니, 너는 너의 모친과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과 생사를 같이 하여야 한다.”고 하며 성중(城中)으로 달려가니 성은 이미 적군에게 포위되어 북쪽을 향해 통곡하다가 적군과 부딪쳐 꾸짖고 굽히지 않으니 급기야 살해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부인 김씨는 마니산(痲尼山)에서 적이 옴을 알고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자결하였으며 아우 돈서(惇敍)는 적에게 포로가 되자 진강(鎭江)에서 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그들의 의와 충절에 경탄하였다.
1685년(숙종 11) 이돈오에게 특별정려가 내려졌다.

제8문 열녀 광주김씨(돈오의 부인)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는 1585년 군수 김태국의 딸로 태어나 자라서 이씨가문(李氏家門)의 이돈오와 결혼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김씨는 가족들과 남편을 따라 강화도에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강령리(江嶺里) 초가 한 칸에 붙어 살다가 남편 이돈오가 훈국랑청(訓局郎廳)이 되니 왕래가 어려워 동문 밖 군기청(軍器廳) 근처로 옮기고 시동생 돈서에게 노부인을 모시게 하고 김씨는 새로 잡은 처소로 돌아왔다. 며칠 후 적이 강화도에 쳐들어오자 위급해 짐에 남편은 김씨에게 시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사생(死生)을 같이 하라하니 김씨부인은 남편과 영결하고 찾아가는데 밤길이 어두워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지경이고 길은 험하며 적군의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 성중(城中)이 몹시 소란함으로 모진 고난 끝에 마니산 아래 척분이 되는 홍명달(洪命達)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피할 길은 막막하였다. 사람들이 ‘검도(黔島)로 피신함이 좋을 것이다’하기에 그곳으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해가 저물어 가기가 어려웠다.
이 때 함께 간 홍계남(홍명달의 자)에게 말하기를,
“어두운 밤이라 동서를 분간하기 어려우며 만약 섬에 도달하지 못한 채 날이 새면 죽으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 해변으로 돌아가서 배가 있으면 건너고 없으면 바다에 몸을 던져 정결하게 죽는 것이 옳겠다.”
말하고 부득이 해변으로 가는 도중 시어머님 일행을 뜻밖에 만나고 차남도 같이 있어 천행이라 여기고 이내 산중으로 들어가 무사히 피하려 하였더니 두 아들이 양식을 구하러 혼가로 내려가고 김씨부인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중에 스며드니 적군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김씨부인은 영결을 하고 말하기를,
“부성(府城)이 이미 함락되어 남편은 반드시 나라를 위해 돌아갔을 것이니 제가 어찌 차마 홀로 살아남겠습니까?”
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 스스로 목을 찔러 순절(殉節)하니 모두가 놀랐다.
그 때가 1637년 53세였다. 1639년(인조 17)에 정려되었다.

제9문 충신 이돈서(忠愍公)
선조 32년(1599) 생, 인조 15년(1637) 졸 수 39,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서 수학하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형 돈오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강화성이 함락됨에 마니산 아래에 모신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찾아가다가 청군에게 포로가 되자 ‘충효가의 자제로서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리오.’하면서 자결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진강(鎭江)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숙종 12년에 강화유수 홍의호가 이돈서를 강화도 충렬사에 배향할 것을 계청하여 숙종 19년(1693)에 충렬사에 배향되니 강화 충렬사에는 우리 연이(延李) 로서 죽창공(竹窓公) 이시직(李時稷), 충현공(忠顯公) 이돈오(李惇五) 그리고 공까지 세분이 배향되었다.

제10문 절부 전주이씨(돈실의 처)
감찰공(監察公 惇實)의 처 전주이씨는 병자호란 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군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인조 15년(1637) 자문(自刎)을 시도하여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죽지 못하고 깨어나 병석에 있으면서도 시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다가 결국 절사하였다. 순종 32년(1706) 이돈오에게 시호 충현(忠顯)이 가증될 때 전주이씨도 절부로 정려되었다.

제 11문 효자 이후성
광해 8년(1616) 생, 호를 소곡(蘇谷)이라하며 생원과와 진사과 두 번 급제하고 참봉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인조 15년(1637)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자결한 어머니(돈오의 처 광주김씨)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니산 아래 가매장 하였다가 부친의 시신을 통진 고양포 임화산에 옮길 대 어머니 시신도 부장(副葬)하였다
또 이듬해 숙부(惇敍)의 시신을 진강에서 수습하여 적성 수정봉에 장사지내고 그 후 13년간 시묘생활을 하면서 부(惇五) 모(光州金氏), 숙보(惇敍), 그리고 선대에서 충·효·열 은전을 내리도록 동분서주하며 평생을 보냈다.
이 사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이 자자하니, 마침내 공도 영조 7년(1731) 효자에 정려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제12문 효자 이후잠
인조 15년(1637) 충민공(돈서)의 유복자로 태어나 관설당(觀雪堂) 허후(許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효자가문에 태어난 것을 자부심으로 가지고 공자의 효행에 대한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 즉 어머니를 섬길 때, 집에 계시면 공경을 다하고, 봉양해서 즐겁게 해드리고, 병이 들면 근심을 다하고, 병이 들면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하고, 제사를 지내면 엄숙함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철저히 실행하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또 조정에까지 알려져 숙종 6년(1680) 장원서별검(종8품)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기지 않았다.
영조 7년(1731)에 효자로 정려되고, 첨지중추부사(정3품)에 증직되었다

제13문 효자 이상기
현종 9년(1668) 생, 영조 18년(1742) 졸, 수 75, 아버지(后定)가 병조참지로 있으면서 바른 말로 직간하였으나 반대파의 미움만 사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상심하다가 돌아가자 공은 죽음으로 연명하면서 직간하고 아버지의 충직함을 꾸준히 상소하여 마침내 숙종 16년(1690)에 아버지가 신원(伸寃: 원통함이 풀림)되어 이조참판,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숙종 21년(1695) 청백리에 녹선 되도록 하였다.
영조 18년(1742) 공의 이러한 효행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곧 효자에 정려되었다

  투신독립 (殺身獨立) 

역사이래 연안이씨에는 역적이 없었으며 반역자가 없었다. 그 흔한 친일파명단에도 연안이씨로된 조상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의병활동,독립군활동 별도)

반면에 역대로 충신과 열사 열부 효자가 부지기수이며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친 독립투사가 대를 이어 수 없이 나타나 조국광복에 앞장서서 일했다 

이 역사적 절제와 피치못할 운명적인 사실이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연안이씨는 천여년 긴세월동안에 이어온  기록을 만 천하에 영광스럽게 알려서 연안이씨가 단순히 고관현작에 양반가문이라는 편집된 이름에 싸잡혀 살아온 집안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손들도 역시 삼한세족(신라-고려-조선)의 선두에 서 온 영광스런 그 조상의 위상과 기개를 이어 이나라 발전에  당당히 앞장서 나가는 기틀이 되기를 바라는 바 크다.  이 관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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